오색찬란한 명절: 5편 왕반지 이야기

집에 갈 때도 되었다

by 이야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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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찬란한 명절: 5편 왕반지 이야기

- 집에 갈 때도 되었다


“일이 많아서 그래”

“근께 뭔 놈의 일이 정월 초하루에도 있냐 이거여”

짜증이 제대로 섞인 엄마의 하이톤 목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는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엄마를 달랬다.

“대기업이나 그렇지. 작은 회사는 명절 때 다들 출근하고 그래. 엄마도 뉴스 봐서 알잖아?”

“그게 회사여 뭐여? 그런 놈의 회사를 회사라고 다니고 있는 거야. 내가 뭐랬냐? 그 잘난 척을 다 하고 속을 뒤집어 놓더니 하이고 무신 벼슬을 헌다고 집에도 못 온다냐.

너희 동생은 그래 돈 따박따박 벌어오고 처갓집에도 잘하는 사위 데리고 와서 지 똑 빼 닮 아가 지고 똑똑하고 야무진 손주 새끼도 턱 안겨주는데! 느그 아버지 그 뚝뚝한 양반이 요새 아주 실없이 웃고 댕긴다.”

나는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한숨이 터져나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잘 되었네. 아빠랑 같이 많이 웃어.”

“웃기는 무신. 느그 아버지 첫째 딸내미 야그만 나오면 허파꺼정 웃음이 쏙 들어간다고 나가 말 허냐 안허냐.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다들 첫째는 좋은 소식 없냐고 물어보는디. 나가 아주 고개를 들고 댕길수가 없어.

우리 막둥이 아들 새끼야 말짓 한번 안 피고 조용히 살고 있으니까. 갸는 냅두더라도.

남은 자식 딸년 두 명 있는디 한년 잘 여의었다 싶어 맘을 놓을란가 했는디. 속을 요로코롬 오지게 썩히냐. 자식 잘 키웠다고 어디 가서 안 빠지는 조인애 팔자가 이럴 줄 누가 알었다냐. 서른이 뭐여 이제 반칠순 들어서는 첫째 딸을 어쩔 것이여?”



어쩌면 숨 한번 안 쉬고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나는 할미넴을 능가하는 엄마의 엠씨 기질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힘없이 흘러가며 라임까지 맞추는 엄마의 래핑은 다만 항상 신선함이 부족했다. 쇼미 더 머니에나 나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화려한 랩은 매번 기승전조인애 팔자로 끝나버린다.

- 그래, 엄마 레퍼토리 좀 바꿔봐 그렇게 항상 똑같이 말하는 거 지겹지도 않아? 식상하잖아 정말.

그러나 나는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힘겹게 삼킨 것은 엄마의 말이 길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식상한 것은 내 삶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면? 변두리 대학 말고 남들 알아주는, 아니 남들에게

이야기하기 좋은 대학 나와서 적당한 남자 만나서 시집가서 애 키우고 살고 있었다면 최소한 저런 무한반복 잔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 이번에 집에 못가. 아빠한테는 내가 말할게. 나 일해야 하니까. 이만 끊어. 설 지나고 다시 전화할게.”

“야가 시방 뭔 소리를 하는겨. 전화로 안 온다고 하면 다 된거여? 주댕이로 톡 나불대면 되냐 이 말이여.”

“나 바빠. 진짜 끊어야 해. 미안해 엄마.”

“야야 반지야 , 이 놈의 기집애가”

왕반지 디스랩이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는 엠씨 조여사를 뒤로하고 나는 핸드폰의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사실해야 할 일은 없었다. 다니던 웹 에이전시가 문을 닫은 이후로 백수로 지내다가 간간이 생기는 웹 설계일로 근근이 먹고살던 중이었다. 말이 좋아 프리랜 서지,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월세 내기도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그게 하필 명절 앞두고였다. 시집 잘 간 동생이며 우리 막둥이 막둥이 하는 대기업 입사자 남동생은 용돈도 두둑이 드리고 선물도 이것저것 가져가겠지? 하지만 동네만 바꿔 반지하 월세살이로 서른다섯의 해를 시작한 나는 아니었다.



왕반지. 이름 따라 왕 반지를 끼고 서울로 시집가서 팔자 펴고 살 거라며 내 등을 토닥였던 조여사의 예언은 ‘반지'에 집중되어있었다. 어쩌면 조여사의 예언은 적중했다. ‘반지'의 이름을 따서 반지하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반지하라고는 해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내 삶을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잘 나가는 동생들에 치이면서 다져진 돌덩이 같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다만, 부모님은 한 번도 내가 사는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일을 핑계로 이사를 핑계로 나는 매번 부모님의 방문을 피해왔다. 전주에서 작은 한옥 민박집과 그보다 더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바쁜 부모님도 내 핑계에 의도치 않게 동조해 주었다. 졸업하고 멋지게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러 회사를 전전하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남들이 하는 것은 다 배우며 지냈다. 모두 나에 대한 투자의 시간이라고 위로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에만 가면, 대학 때는 졸업만 하면, 졸업하고 나서는 회사에 취직만 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멋지게 이뤄지리라 생각했는데 삼십 대 중반, 반칠순의 나이에 들어서고 보니 나란 사람은 자립도, 성공도 결혼도 어느 것 하나 이뤄낸 것이 없었다. 사실, 연애부터 해야 하기는 하다. 아홉수를 피해 썰물 빠지듯 우수수 시집을 갔던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당시 연애 중이었던 나도 결혼을 서두르기는 했었다. 결국 상견례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헤어진 6년 전의 연애를 마지막으로 나에게는 더 이상의 연애활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예쁜 옷 차려입고 선물도 챙겨서 멋진 차를 끌고 집에 가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옆에는 조여사가 자랑할만한 사위가. 아니면 사윗감이라도 붙어있는 상태로. 매번 하는 지겨운 생각이지만 이번 명절에도 역시 상상뿐이다.



반지하이긴 해도 오르막길에 위치한 집의 특성상 현관 반대쪽에는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는 지상이다. 반은 지상이니까 반지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등 뒤의 현관 입구를 보자니 영락없는 반지하라서 나는 나와 똑 닮은 집에 살고 있구나 싶어 졌다.



아침에는 집집마다 다들 각자의 갈 곳을 향해 가는지 동네가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조용하다. 노트북을 켜니 새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깜박이고 있었다. 프로젝트 계약 여부를 놓고 조율 중인 회사에서 온 메일이었다. 처음 일정보다 일주일 정도 앞당겨 마무리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는 것이 요지였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약을 수락하고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확인했다. 분량을 보니 욕이 나왔다. 클라이언트를 향한 욕인지 나를 향한 욕인지 모르겠지만 알게뭐람. 적어도 4달은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혼자 남은 방에서 무심코 달력을 넘겨본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다음 명절이었다. 반년 넘게 남아있었지만 그 시간마저 후딱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다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는 명절 인사라고 오는 단체 카톡도 끊겨 조용하기만 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스케줄 관리 앱을 켜서 지난 추석에 입력해 놓았던 설날 일정을 확인했다. ‘이제 집에 갈 때도 되었다'라는 제목이 외로워 보였다. 나는 상태 표시를 ‘연기'로 선택하며 금년 추석 즈음으로 일정을 다시 입력했다.


이번 추석에는 ‘연기'가 아닌 ‘마침'으로 입력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앱을 끄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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