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상): 한지운의 이야기

Nobody Knows

by 이야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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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야기 안 했어?"

재훈이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뭘? 아까 화장실갔다 온다고 했잖아요."

카페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서 팔짱을 끼고 있던 재훈이 몸을 바로 고쳐 앉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쏘아 보았다. 나는 테이블 중앙에 있던 나란히 놓여있던 휴대폰 중 하나를 내 쪽으로 도로 가져왔다.

"비번 걸어 놓았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는 항상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왜?"

재훈이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는 적어도 남의 휴대폰에 손 대는 사람은 아닐 거라생각했거든"

"너 아까 화장실 가기 전에 나한테 메신저로 재미있는 짤방보내준다고 했었지?"

"하지만 내 휴대폰을 뒤지란 말은 아니었어요."

"뒤진 적 없어. 내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네 휴대폰에 온 메신저 알림을 보았을 뿐이야. 그리고 넌 알림 메세지에 일부 내용까지 뜨도록 설정해 놓았고."

재훈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알림 메세지에 내용까지 뜨도록 설정해놓지를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아예 휴대폰을 꺼놓거나, 화장실에들고 들어갔어야 했다. 이런 문제로 서로 다퉈야 하는 상황 자체를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제가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뭐?"

"굳이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있냐고요?"

재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반대의 상황이면? 내가여자 후배랑 단 둘이 내일 만나기로 한 걸, 네가 지금 알았다면? 난그것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저는 후배 아니고, 대학교동기에요. 그리고 만약 오빠가 일 때문에 여자 후배를 만나기로 한 거면, 저한테 굳이 보고 해야 할 필요는 없겠죠. 단 둘이 보든, 열 명 이상 팀으로 보든 말이에요."

재훈이 테이블 중앙에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잠시 후 내메신저에 짤방 하나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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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지금 내 심정"

"지금 장난해?"

"그럼, 너는지금 장난해? 서울도 아니고, 대학교 동기 일하는 곳까지찾아가서 만나?"

"그럼 어쩌라구요? 그친구는 직장인이고, 나는 말이 프리랜서지 반 백수인데 그 친구한테KTX 타고 서울오라고 해요? 걔는 갑이고, 나는을인데?"

"너 원래 이렇게 저 자세인 애였어? 난 몰랐네?"

"오빠랑 나는 갑과 을이 아니니까."

"내가 너한테 을은 아니었고?"

"지금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그래, 대학교동기랑 일 때문에 단 둘이 만난다고 치자. 근데 지금 일을 시작하는 단계도 아니고, 거의 일 마무리 단계더라. 이제 우리 일도 막바지 단계니까, 조금만 더 네가 수고해 주면 될 거 같다고 하는데, 그 동안 난네가 무슨 일 하는지도 몰랐던 거네?"

"오빠가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일일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너는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알고 있잖아."
"그건 오빠가 이야기 해주니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먼저 알려달란 적 있어요? 왜 연인이면, 모든 사생활은 물론,커리어까지 낱낱이 알려고 하는 거예요?"

"너 CIA 요원이야?"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런 것도 아니면, 일일이말해주지 못할 이유는 또 뭐야? 낱낱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일의 바운더리까지는 이야기해줄 수 있잖아."

"이야기했는데"

"무슨 이야기?"

"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는 친구랑 과학 웹진 일 몇 개 할수도 있다고."

"그게 이 일이야?"

"그런 거 같은데?"

"그 친구가 대학교 동기,그것도 남자고, 단 둘이 업무 때문에 자주 만나야 한다는 이야긴 안 한거 같은데?"
"응 안 했어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공과사도 구분 못하는 인간들이랑 말싸움하는 거 나도 지치거든. 귀찮은 상황 만드는 게 싫어서."

"넌 연애가 귀찮아?"

"누가 연애가 귀찮대? 왜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자꾸 말꼬리 잡고 늘어질 거야?"

"안 하던 짓? 그럼나는 항상 네 비위 맞춰주는 사람이야? 네가 이야기만 해줬으면 내가 지금 이래?"

재훈도 나도 폭발 직전이었다. 때마침, 카페 진동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쳐다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연애를 쉬던 시절, 카페에서 이렇게큰 소리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으면 속으로 욕하곤 했다. 싸움은 니네 집에 가서 하라고, 이 민폐 덩어리들아. 그런 짓을 내가 지금 하고 있었다. 재훈이 진동벨을 집어 들고 카페 카운터로 갔다. 그 틈에 나는 재훈에게메시지를 보냈다.

"나 카페에서 이렇게 싸우기 싫으니까 오빠 생각 정리 되면연락해요. 나는 내일 일하러 가야하고, 오빠가 아까 훔쳐본것처럼 웹진 마무리 단계라서 당분간 바쁠 거야. 그러니까 전화는 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생각 정리해서 메세지를 보내든지, 메일로 보내든지. 그러면 확인은 24시간 이내에는 할 테니까, 바로 확인 안 한다고 또 징징대지 말고."

이렇게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감정은 언제나이성을 앞섰다. 나는 가방을 챙겨 카페를 나와버렸다. 진욱은, 대학교 동기라고는 하지만 학교 다닐 때는 서로 말을 해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내가 진욱을 제대로 본 건 새 학기가 시작되고, 전공 수업에 부록처럼 따라오는 자기소개시간이 전부였다.

우리 과에 하향 지원했는데 덜컥 붙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등록했다는 진욱은 학교를 거의 나오지 않았다.

십년 만에 연락해온 진욱이 내게 일을 맡긴 것도, 그나마 진욱이 근황몇 마디라도 주고 받으며 지내왔던동기가 갑자기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대타를 뛰게 된 것뿐이다. 어쨌든 진욱은 보수를 주고, 내게 일을 맡기는 입장이었고 나는 일이 있으면 한 건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나는 철저하게 진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나라고, 금요일 꼭두새벽부터 KTX를 타고 경주를 왔다 갔다 하고 싶겠는가? 경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재훈에게 연락하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봄이 가득한 경주는 연인과 함께 걷고 싶은 곳이었지, 경주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경비는 둘째치고, 밥은 먹었냐고 인사치레로라도 물어보지 않는, 대학교 동기에게 아침부터저녁까지 붙잡혀 있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그때마다 진욱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재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재훈은이렇게 이야기할 테니까.

"내가 항상 경주에 내려갔으니, 이번에는 네가 서울로 올라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야지."

재훈은 언제나 내 편이었고, 그런 재훈이라면, 내가 진욱에게 끌려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나는약한 모습을 재훈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단 둘이 만나서 일 이야기를 할지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누가 알겠어? 아무도 모르지."

재훈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재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훈은 전화를받지 않았다. 나의 휴대폰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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