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와 건기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우기 때문이었다.
세계 3대중 하나로 손꼽히는 석양을 보지 못한 것도 우기 탓, 스노클링을 하러 나가서 푸른바다거북을 보지 못한것도 모두 우기 탓이었다.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우기가아닌 건기에 이곳에 왔다면 진욱의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연착된 것도 물론 우기 탓이었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그의 비어 있는 자리를보며 깨달았다. 그의 우기란 애초에 세상에 없는 계절이었고, 나의 우기는 당장은 비가 그칠 가망이 없는 계절임을.
진욱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건기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그건 비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진욱의 왜곡된 주장일 뿐이다. 물론, 그때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비가 온다고 해도 하루 중 두 세 번의 짧고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을 뿐이다. 한 시간 이상 비가 내린 적은 없었다. 비가 내린 시간을 다 합해봤자하루 중 고작해야 십여 분.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리들의 우기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한국에서 만나는 동안, 전혀 비가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빗줄기가 우리들이 있던 호텔의 창문을 세게 때렸잖아.
당시 나는 저러다 에어컨이 부셔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호텔 지배인이 만약 생트집을 잡는다면 에어컨이 멀쩡히 창문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폰으로 남겨두었다가 증거로 내밀어야지, 따위의 생각을하고 있었다.
진욱은 만약비가 조금이라도 왔다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했다.
비가 오면 내 몸이 질척거려서 무거워진다고.
진욱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의 일기 예보를 찾아 보여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가 내린다고 해서 그의 몸이 물기로 번들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진욱은 축축하고 습한 것을 견디지 못했다.
어쩌면, 강우량 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비는언제나처럼 내릴 만큼만 내렸다. 이 정도면 우기의 평균 강우량이라고 시가지에 있는 현지 식당 주인이입을 모아 말했다. 비를 긋기 위해 잠시 호텔에 들어가 있으면, 진욱은침대 시트에 벼룩이 있는 것 같다는 둥 새끼 도마뱀이 침대 기둥을 타고 다닌다는 둥 내 신경을 건드렸다. 진욱의휴대폰을 빼앗아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버리면, 결벽증을 몸에 두르고 사는 저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까? 아직, 구름은 흰색이었지만, 곧 시커멓게 변할 것이다. 우기와 친해지면, 그런 것쯤은 감으로 알 수 있게 된다.
문득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결단코 세일링 보트에서 일부러 그랬던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발이 미끄러졌을 뿐이고, 진욱은 현지 가이드의 말을 듣지 않고, 휴대폰을 방수팩에 넣어 목에 걸고 있다가 불시의 습격을 당한 것뿐이다.
"야, 내 방수팩을 쥐어뜯으면어떻게 해?"
진욱은 보트에서 넘어져 피가 흐르고 있는 나의 새끼발가락을 힐끗 보더니, 계속 제 할말을 이어서 했다.
"휴대폰이 바다로 가라앉은 것도 아니잖아.내가 중심을 잃고 네 쪽으로 기울다가 네 목의 방수팩을 어쩌다 잡아뜯은 것 뿐이지."
"그래서 휴대폰이 보트 바닥에 떨어졌잖아.이렇게 물이 가득한데!"
"애초에 네가 목에 방수팩을 걸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어. 그래도 휴대폰은 방수팩에 들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너, 지금 사과가 우선이란생각 안 들어?"
진욱이 소리쳤고, 내가 말했다.
"그래, 미안해."
"너 무슨 대답이 그 따위야?"
여차하면, 보트라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노로일그러진 진욱의 눈빛은. 나는 씩씩대는 진욱에게 말했다.
"우리 그만하자. 너랑 나,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알았잖아."
"나, 지금 여름 휴가 중이야."
진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휴가 망치지 마."
너는 항상 휴가 중이라, 휴가 귀한 줄 모르겠지만. 진욱이 덧붙이는 말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진욱은 보트에서 내려 첨벙첨벙 걸어갔다. 나는 진욱이 방수팩을 내팽개치는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나 일이 바빠서, 휴대폰을한시라도 몸에서 놓을 수 없다던 진욱이었다.
바다 한가운데라서 다행이었다. 비가 하염없이 쏟아져서 다행이었다. 나는, 얼굴에 흘러내리던 빗물을 닦지 않았다. 우기에는 그저 비를 맞는 수밖에 없다. 비를 긋기 위해 부러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지나면 이 계절이 지날 것이고, 우기도 건기로 바뀔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저, 비를 맞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