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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Nov 12. 2017

[달.쓰.반] 69편/연극 1984, 나는 왜 쓰는가?

원작 조지 오웰/연출 한태숙/명동예술극장(2017.10.20~11.19)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69

   ※  주의 : 이 리뷰에는 연극 <1984>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현재 명동 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1984>를 보러 가기 전, 

조지 오웰의 원작 소설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책의 내용 전부를 다시 읽은것은 아니었고 , 

부록인 <신어의 원리>만 살펴보았다.

<신어의 원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쓸데없는 말을 줄이는 작업이라는 것.

'좋다', 라는 말의 반대어는 '안 좋다'라는 단어로 이미 충분하지 

'나쁘다'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연극에서도 나온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단어들을 줄여나가다보면 

결국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도구가 없어질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국가 오세아니아에서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피지배 계층을 스스로 사고하는 인간이 아닌,

당에서 배급해주는 언어만을 쓰는 사람들로 길들이고자 하는 것)

언어와 사고력의 상관 관계. 요즘 내가 어휘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상대방과 깊게 나누고 싶어도, 

마땅히 내 생각을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심도 있는 토론 또는 대화가 되지 못했을 때, 

나는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연극 <1984>에서도 윈스턴은 줄리아의 손을 잡고 말한다. (100%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옛날엔 단어들이 있었어.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표현해 줄 단어들이. 그런데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연극은 액자 구조로 진행된다. 

연극이 시작되면 독서 모임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윈스턴 스미스가 쓴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한다.

독서 모임 사람들은 이제 당이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진짜 당이 무너졌진 이후의 시점인지는 모호하다.

현재의 시점은 2020년으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무대의 한 구석에는 마치 이들을 지켜보는 듯한 사람이 앉아있다. 

바로 이 연극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한다. 쓴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윈스턴 스미스가 빅브라더의 지배 아래서 살고 있던 시대에는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사상범이 될 수 있는 시대다. 

이제, 연극은 1984년으로 되돌아간다. 

(사실,  극중에서 윈스턴스미스가 존재했던 시대가 1984년인지 아닌지도 모호하긴 하지만

나는 편의상 그렇게 이해했다)

연극 <1984>는 로버트 바이크, 던컨 맥밀런의 2013년 각색본을 바탕으로 국립극단이 

국내에서 처음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연출은 한태숙이 맡았다. 

한태숙 연출가의 연극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연극이 다소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연극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읽었다고 할지라도 서사가 간결한 구조로 되어 있는 원작 소설에 비해 

모호한 시대적 배경과 연극 곳곳에 녹아 있는 중의적인 표현과 상징 때문인지 

줄거리 파악이 단번에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나는 2020년, 혹은 근미래의 윈스턴 스미스를 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를 보고 있는 건가.

뜻 모를 가사의 노래들을 배우들은 대체 왜 부르는 건가. 

개인의 기억 속에서 전승되는 과거의 이야기들인가.

아니면 주인공의 미래를 암시하는 도구인가.

하나, 하나, 그 의미를 다 파악하려고 하면 머릿속에 물음표만 둥둥 떠다닌다.

하지만, 원작 소설이든 연극이든 작가나 연출가가 전하려고 하는 메세지 만큼은 분명하다. 

연극이 시작되고, 

무대 위 텔레스크린에 뜬 캐치프레이즈.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 자유는 굴종인가?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한다면,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2+2=4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들 앞에서,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모진 고문을 가하는 자들 앞에서 

2+2=4라고 말할 수 있나?

2+2=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던)

윈스턴은 진리부에서 근무한다. 

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과거의 기록들을 삭제한다. 

하지만 그는 당에 반감을 가지고 있고, 당에 반대하는 지하 조직에

들어갈 뜻을 품고 있다. 

윈스턴은 과거의 흔적을 삭제해도 개인의 기억 속에는 남는다고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을 너무 얕봤다. 

오브라이언.  윈스턴은 그가 당을 반대하는 형제단이라고 믿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이중사고. 연극 <1984>의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개의 상반된 진실 혹은 모순을 동시에 믿는 행위이다.

(ex. 딸을 당에게 충성하는 훌륭한 사상경찰로 키우고 싶어하지만,

잠꼬대로 당을 타도하자, 라고 말했다가 

사상경찰 교육을 받은 딸에 의해 고발당한 파슨스도 이중 사고를 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출처: 국립극단 홈페이지 (http://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5723)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네가 원하는 진실을 주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을 통해 읽었던 책들. 자유에 대한 갈망. 

그 책을 읽으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윈스턴. 

그런데 그 모두가 윈스턴을 엮기 위한 계략이었다니.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윈스턴에게 오브라이언은

그가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당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나?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해도?

어린 아이의 얼굴에 황산을 뿌려야 해도?"

"...하겠습니다."

"이래도 우리와 네가 다르다고 생각하나?"

줄리아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말에, 

자신은 줄리아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윈스턴은

쥐에게 얼굴을 뜯어먹힐 신세가 되자, 결국 처절하게 외친다.

"제발 나한테 하지 마. 줄리아한테 해. 줄리아한테 하라고!"

이번 연극이 흥미로웠던 건, '빅브라더'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 중에서도

개인의 내면에 좀 더 포커스를 맞췄다는 것이다. 

빅브라더의 사회적 맥락, 현대적 의미 등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겠지만, 

'이중사고'라는 키워드를 통해 

모순된 진실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혼란에 빠지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한편의 심리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승헌 배우는

혼란에 빠진 윈스턴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오브라이언의 대사 톤은 배우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 

(오브라이언의 목소리는 

윈스턴을 만나기 전, 윈스턴과 대면한 후, 윈스턴을 고문할 때의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조금 다른 듯 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그 톤의 변화가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다.)

객석은 1층과 2층인데 

배우들이 2층 무대에 가끔 등장하기도 한다.

(줄리아와 윈스턴의 밀애 장면. 이 장면은 

두 주인공들이 성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장면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데, 

이 때문에 17세 관람가가 된 것 같다. 연극에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출산이라는 목적 이외에는 성적인 즐거움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인듯)

고문씬은 생각보다 리얼한 편(게다가 길다)이다.

이제 공연일이 며칠 안 남긴 했지만

좌석이 아직 남아 있다면, 평일보다는 주말 관람이 나을 것 같다. 

퇴근 직후 이 연극을 봤더니 

윈스턴의 멘탈 갈림과 동시에 내 영혼도 탈곡된 듯. 

한번 보고 나면, 심신이 완전히 피곤해지는 연극이긴 하다.

그만큼 집중해서 봐야 할 장면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연극이지만 

매일 오늘 점심은 뭐 먹지? 이번 주말에는 어디 가서 놀지?이런 생각만 하다가, 

110분 동안만이라도 진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공연 시간 110분. 휴식시간 없음)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책장에 있는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펴본다. 

이번에 다시 읽은 장의 제목은 '정치와 영어'이다. 

지금까지 보여주고자 한 바와 같이, 오늘날 최악의 글쓰기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알맞은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데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이미 정리해놓은 긴 어군들을 이어 붙이고 순전한 속임수로 

그것을 받아들여질 만하게 만드는 데 있다.(p.267)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테면 무방비한 마을이 폭격을 당하고, 주민들이 시골로 내몰리고,

가축들이 기관총 난사를 당하고, 오두막들이 소이탄에 타버리는 것을 

평정(平定)이라 부른다.

수백만의 농민이 농지를 강탈당한 뒤 지고 갈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길을 걸어서

길을 떠나도록 내몰리는 것을 '인구 이동'이나 '전선 조정'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재판도 못 받고 몇년 동안 투옥되거나, 뒷덜미에 총을 맞거나, 

북극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괴혈병으로 죽는 것을 '의심 분자 제거'라 부른다.

이런 식의 어법은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법 없이 명명하고자 할 때 필요하다.(p.270)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p.271)


지금까지 내가 다룬 문제는 언어의 문학적 사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숨기거나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언어에 대해서만 

다루어본 것이다. (p.275)



"정치적인 언어는 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고 살인을 존중할 만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순전한 헛소리를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다(그리고 차이는 있어도 보수당에서부터 무정부주의자에 이르기까지모든 정당이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단번에 다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습관은 바꿀 수 있으며, 충분히 조롱을 퍼부어준다면 이따금 진부하고 무용한 관용구를 본래 자리인
쓰레기통으로 보낼 수도 있다.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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