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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Dec 01. 2017

[SF를 찾아서] 1편/Happy SF

과학 소설 전문 무크 제2호/창작 SF 단편 수록

그때그때 생각나면 찾아오는 비정기적 SF 장르 리뷰 NO.1

                                                                                                                                                                                                                                                                                                                                                                                                                        

<Happy SF>  목차
-창작 SF
  ․ Rebirth-내 몸의 파편들이 흩어진 길 따라 / 복거일        14
  ․ 진화신화 / 김보영        27
  ․ 지구멀미 / 김주영        48
  ․ 교정 / 김창규        66
  ․ 스윙 바이 / 배명훈        79
  ․ 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98


내가 SF 장르를 좋아했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

쉽게 '그렇다'고 대답은 못할 것 같다.

(SF장르는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인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와 스타트렉 시리즈는 모두 봤고,

집에  <Happy SF>, 이런 잡지까지 있는 걸 보면(언제 샀는지 도통 기억은 안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무려 2006년에 발간된 잡지이긴 하지만,

보물 찾기를 한 심정으로 이 무크지에 수록된 창작 SF단편집을 읽어보았다.

그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단편은 김보영 작가<진화신화>와

정소연 작가의 작품<앨리스와의 티타임>이었다.

김보영 작가의 작품은 우주라든지, 외계인, 이런 말이 하나도 안 나오는 대신

전설속 동물이 등장하는 고대국(?)이 배경이다.

이런 배경도 SF장르로 볼 수 있구나, 하는 호기심으로

소설을 읽어나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숙부인 왕을 피해 도망친 왕족으로,

그의 몸은 자꾸 기이하게 변한다.


새 왕이 등극한 이후 나는 방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았다.

어두운 밤에나 박쥐처럼 처소를 빠져나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니다가

새벽이 되기 전에 들어오곤 했다. 내 피부는 밤 색깔에 맞추어 검푸르게 변했고,

눈은 언제부터인가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망막에 변형이 와서 그 뒤쪽에 빛을 반사하는 층이 생겨난 탓이며,

망막층의 발달은 야행하는 사람에게 흔이 일어나는 현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 동공이 커지고 낮이면 고양이처럼 가늘게 줄어드는 것도, 민감해진 눈이 망막에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후대에 대물림될까 걱정하자, 의사는 용불용(用不用)의 법칙은 흔히 1대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후천적으로 얻은 기질이 유전된다는 증거는 없다며 위로했다.

-김보영, <진화신화>/P. 28


겨울 중에 나는 허물을 벗었다. 가혹한 환경을 견디다 못해 몸뚱이가 결국 골격구조에서

내장기관의 위치까지 변화시키는 일종의 '정리'를 결정한 것이다. 나는 껍질이 몸에서 벗겨져 나가는 동안

몇번을 실신했다가 깨어났다. 허물에서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니, 아직 인간의 모습이 남아있는 처참한

껍질이 뒤에 남겨져 있었다. 새로운 몸에는 뱀처럼 미끈거리는 비늘이 돋아나 있었고,

도마뱀 같은 긴 꼬리가 돋아나 있었다.

나는 잃어버리고 만 내 인간성 앞에 조금 울었지만 곧 진정했다.

내 몸은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 파충류의 형질을 택한 것이다.

내 몸은 최소한의 내 이성보다 현명하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보다 생존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P.36)


나는 내가 상승기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 몸이 대기의 흐름에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거대해졌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나는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나를 쫓아오던 군사와 왕이 망연자실해서 발을 멈췄다. 몸을 내려다보니, 햇빛을 받은 내 푸른 비늘이

시원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물고기와 같은 긴 꼬리가 땅에 닿을 듯이 길게 휘젓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 구름을 뚫고 게속 상승해 올라갔다. 대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왔고,

바람을 타고, 그 방향을 바꾸는 법을 느낄 수 있었다.

(중략)

왕이 난으로 죽은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내가 창공을 날고 있었던 날이었다. (P.46)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몸이란, 인간의 외피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의 종이 그 형태를 변화시키는 데 아득한 시간이 걸렸던 시대에 대해 알고 있느냐.

종의 분화가 일어나는 데에 수십 만년씩 걸렸던 시대도 있다.

그러나 그 지루한 시대가 지금보다 못한 시대도 아니었다.

그저 그 시대에는 그런 방식의 적응이 필요했을 뿐이다.

자연은 선악과 우열의 가치판단 없이 생존의 방식을 결정한다. 인간의 표현 형질은

자연이 택한 생존의 한 방편일 뿐이다. 집단에 섞이지 않고 도구에 의존하지 않으면 토끼보다 약한 것이다.

형편없이 약한 것이 나를 불쌍히 여긴다니 이런 오만이 또 어디 있느냐."

호랑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P.34)


정소연의 <앨리스와의 티타임>은 다세계연구소에 근무하는 주인공이

평행 우주 여행을 통해 앨리스라는 이름의 부인을 만난 이야기다.

주인공이 사는 세계에서 앨리스 브래들리 셀든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페미니즘 과학소설의 선구자.

1967년부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가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성, 자아, 여성주의, 환경, 그리고 죽음에 대한 깊이있고 음울하며 충격적인 성찰들 담았던

그의 단편은 1970년대 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여자라는 사실은

1977년에야 밝혀져 SF계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이를 '팁트리 쇼크'라고 한다고.)

1945년에 허팅턴 셀든과 결혼했고, 1980년대 초부터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을 간병하다 남편의 죽음이 가까워진 1987년 5월, 남편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앨리스와 주인공 리즈는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난 국방성에서 근무했어요. 이계정보수집부에 들어간 건 사십년대 말이었고,

아마 아가씨도 알겠지만 그때는 한창 살벌하던 시절이라, 누가 패권을 가질 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죠. 윗 사람들은 소련과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를 알고 싶어 했고,

자세한 방법은 모르지만 그래서 이계로 가는 문이 열렸어요. 시간을 앞뒤로

사십 년 정도 뛰어넘을 수 있었죠. 엄밀히 말하면 우리 세계의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옆 세계의 미래나 과거에 과는 거였지만, 처음에는 그걸 몰랐죠. 전쟁의 흐름을 직접

바꿔보려는 시도가 몇 번 실패하고 나자-과거를 바꾸면 다른 평행 우주의 지류가 만들어질 뿐임이 알려졌죠-

미래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정보부의 핵심 관심사가 되었죠. 미래는 지금보다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나는 50년대 초에 이미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결혼한지도 몇 년 되었고,

이제 그만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거든요. 글도 쓰고, 어머니처럼요.

(중략)

"1987년이면, 설마?"

"그래요. 내가, 그러니까 당신의 세계의 내가 남편을 쏘아 죽이고 자살한 해죠.

시시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어요. 솔직히, 이런 말 하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게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하필이면 내가 87년에 가서, 내 자살 기사를

내 눈으로 읽게 되다니. 남편의 병은 알츠하이머였죠.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게 어떤 병인지 잘 몰랐어요. 넋이 나가서 내 세계로 돌아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리고 나는 남편을 살리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뭐, 불치병의 치료법이 있는 세계를 찾겠다는 것이 꼭 이기적인 욕심만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나는 아직 어렸죠. 아가씨는 지금 몇 살인가요? 그때 내가 삼심대 중반이었으니...

사랑에 푹 빠진 삼심대에게, 칠십이 넘어 남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는 미래가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해봐요.

나는 CIA로 자리를 옮겨 정보 수집을 계속 했죠. 병명은 평행 세계마다 다르니까 증세로 치료법이 있는지

알아봐야 했어요. 시간도 많지 않았고, 말했다시피 험한 시대였거든요."

(중략)

"헌트는 79년에 죽었어요. 폐렴이었죠. 우습게도 나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할 때까지도

노인뇌수축증의 치료법을 찾아냈으니 우리가 앞으로 적어도 십 년, 이십 년은 함께 살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건 이미 우리 미래가 아니었는데."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켜고 셀든 부인을 돌아보았다. 부인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다른 세게에서 가져온 치료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는지 난 몰라요.

내가 어떤 글을 쓸 수 있었을지,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지 몰라요. 사실 아가씨에 물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지금은 모르는 채로 있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도 서운하다면, 미안해요."(P.108)


평행 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유명 작가,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작가를 만나는 일은 어떤 기분일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라는 작가의 이름은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런데 그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이른바 '팁트리 쇼크'가 일어났다면,

여자이기 전에 그녀는 작가로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던 걸까?

여자임이 밝혀진 다음에는 작가로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까?

소설 외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녀의 작품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배명훈의 <스윙 바이>는 재미있게 읽었다.

"근데 이 기계, 지금 우리에 대해 쓰고 있는 거 맞죠? '이번에 특허 나온 기술입니다'라는 문장이 써졌어요.

아 지금 제가 하는 말도 써지는데요."

"예. 그런 장치예요. 뭔가를 적는 기술이에요. 재밌죠? 이게 실용화 되는 걸 보지도 못하시고

그렇게 되셨으니. 그런데 이게 좀 말썽을 일으키고 있어서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게 전에는 안 그랬는데 팀장님 장례 끝나고 와서 다시

작동시켜 보니까 뭘 써도 죄다 에로 버전으로 쓰고 있어서요. 사람 말은 그대로 받아 적고는 있는데

서사는 전부 다 에로에요. 이대로 가면 낭팬데. 다음 주면 나사(NASA)에 갖다 줄 기술이거든요.)

-배명훈 <스윙 바이>/P. 81

그리고 팀장이 남긴 마지막 편지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중략) 고장 났다고 무조건 컸다 켜지 말고 제발 때리지도 말고 곱게 곱게 잘 생긴 남편에게 가져오도록.

누추한 기계 안에 내 고매한 영혼을 담아서 보낸다. 영광으로 알아라 안녕."/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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