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도담삼봉(島潭三峯)/ 추사 김정희의 석문(石門)
"오늘" 생각난 장소에 대한 비정기적 매거진 No.40
山明楓葉水明沙 (산명풍엽수명사)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三島斜陽帶晩霞 (삼도사양대만하)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爲泊仙橫翠壁 (위박선사횡취벽)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待看星月湧金波 (대간성월용금파)
별빛 달빛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네
百尺石霓開曲灣 (백척석예개곡만)
백척의 돌무지개가 물굽이를 열었으니
神工千佛杳難攀 (신공천결묘난반)
신이 빚은 천불에 오르는길 아득하네
不敎車馬通來跡 (불교거마통래적) 거마가 오가는 발자취 허락지 않으니
只有煙霞自往還(지유연하자왕환)
다만 연기와 안개만이 오갈뿐이네
위쪽의 시는 퇴계 이황이 도담삼봉(島潭三峯)을 ,
아래쪽의 시는 추사 김정희가 석문(石門)을 보며 지은 것이다.
도담삼봉,석문,구담봉,옥순봉,사인암,상선암,중선암,하선암을 일컬어 단양8경이라고 하는데,
이 단양8경을 지정한 이가 바로 퇴계 이황이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된 퇴계는 소백산맥과 남한강의 지류가 얽힌 단양의 절경에 흠뻑 취해 8경을 하나씩 지정했다고 한다.
도담삼봉은 남한강 상류의 강 가운데 있는 세 개의 기암으로 된 봉우리로, 명승 제44호로 지정됐다. 도담삼봉의 입장료는 무료지만,
주차료 3천원을 내야 한다.
유람선이나 모터보트를 타면 단양8경 제1코스에 해당하는 도담삼봉-석문-은주음-자라바위를 돌아볼 수 있다.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지을 만큼,도담삼봉을 사랑했다.
한편 도담삼봉에 얽힌 정도전의 일화를 보면,
소년 시절부터 드러난 그의 정치가적인 면모를
알 수 있다.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 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는 이유로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알게 된 소년 정도전은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아무 소용없다.
이런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반박 의견을 냈고,
그 뒤부터 단양은 정선에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석문은 도담삼봉에서 그리 멀지 않다. 표지판을 따라 5분~10분 정도 걷다보면 노래비가 나오는데, 그 노래비 옆길로 석문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계단이 조금 가파르긴 해도, 한라산이나 북한산 등반에 비하면, 매우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수준이다. 입구에서부터 겨우 200m밖에 안 된다. )
계단을 오르다보면, 정자가 하나 나오는데, 정자로부터 50m여미터를 조금 더 올라가다보면 석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명승 제45호인 석문의 왼쪽 아랫부분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옛날 하늘나라에서 물을 길러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마고할미가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석문은 석회동굴이 붕괴되고 남은 동굴 천장의 일부가 마치 구름다리처럼 형성된 것이다.
석문 너머 통해 보는 남한강의 물줄기와 도담리 마을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의 문집(玩堂集)인 완당집에 시를 남겼다는 추사 김정희가 떠오른다.
"백척의 돌무지개가 물굽이를 열었다"는 시의 첫구절은 어떤 광경을 보고 지은 것일까?
나는 고작 석문은 자연이 만든 필터요, 렌즈구나 이런 진부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시서화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바라보던, 석문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잠시 생각하다, 다시 도담삼봉으로 향했다.
때는 바야흐로 보름달이 뜨던 날이었다.
구름 속에 가린 달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더니,
도담삼봉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낮에는 도담삼봉에 내 눈의 초점이 오롯이 맞춰지진 않았는데,
이제는 달빛에 기댄 도담삼봉만과 고요한 물결위에 어룽이는
그림자만이 보인다.
이번에는 "별빛 달빛아래 금빛파도 너울진다"는 퇴계 이황의 시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처음엔 달을 바라보느라, 별을 볼 생각을 못했는데,
고개를 잠시 돌려보니, 별 또한 그득하다.
그저 나는 좀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려고,
솜씨도 없이 사진이나 몇장 찍고
몇마디 끄적거릴뿐이지만,
그들은 오래도록 회자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내가 본 풍경과 그들이 바라본 풍경과
꼭 같지는 않았겠지만,
시 한수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의 문인들처럼
나도 어느날은 셔터를 누르는 대신
시 한편 의 여유를 누리는 그런 휴가를
보낼 수 있다면, 이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