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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Feb 04. 2019

[달.쓰.반] 85편 / 여름, 스피드

김봉곤/ 문학동네 / 2018년 6월 출간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85


'오토픽션’

프랑스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세르주 두브로프스키가  소설 <아들>을 출간하며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사실에 기반을 둔 자서전 오토바이오그래피 (Autobiography)와 허구적 내용의 소설인 픽션 (Fiction)을 혼합한 말로,  

오토픽션의 특징은 책의 주인공과 작가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이 자전적인 이야기에 허구적인 내용을  섞어 소설로 재가공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기에,

오토픽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래서 뭐?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글쓰기는 결국 오토픽션이 아닌가.

소설집 <여름, 스피드>의 작가는 작품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 그 배타적으로 생기는 내밀함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때로는 한계를 벗어난 곳에서 설명 없이 설명되기를, 오해로 이해되기를."


나는 "명백하게 나"이지만, 나는 "나"와 관계없다는,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줄타기가 좋았다


            

p. 132

  형을 만났을 무렵, 나는 사랑하는 데 지쳐 있었다. 누가 사랑하랬지?

  누가 사랑하는 존재랬지? 그건 누가 만든 이미지지?

수십 번을 물어봐도 결국 나였고, 나는 이제 그만 자기 증명의 관계성을 끊고 싶었다.

 상경 후, 내적 갈등을 끝낸 스물네 살 겨울 이후로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내가 보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실과 사정과 사건이 내가 게이라는 걸 지시하거나 게이가 아님이 아님을 지시했으니까.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라스트 러브 송' 中


지난 해 겨울,  한해 동안 큰 화제가 되었던 책이 무엇이냐는 대화를 하다가,

이 책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고,

연말, 나들이를 나간 서점에서

우연히

소설가 50인뽑은 소설, 공동 1위로 뽑혔다는 카피를 보았다.


이 책의 그 어떤 무엇이 소설가들로 하여금 표를 던지게 만들었을까?

라는 궁금증에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 책을

퀴어 서사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커밍아웃한 작가의  자전 소설로 읽을 수도 있겠고,

누군가 이 책을

'사랑'에 대한 충만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글쓰기"에 관한 절절한 고백으로 읽혔다.


p. 48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나날들에 대해 기억해야 할 순간이 왔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날들은 쓰지 않아도 되는 날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잠시 후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 고 말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건 비약이었다.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건 어떤지 내 삶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를 절하하는 건 얼마든 좋았지만, 내 삶을 할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고 한 번쯤 우겨보고 싶었다.


'컬리지 포크'  中



p. 225

오토픽션의 부끄러움과 곤란함.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은 사생활이라 여겨지는 나의 내밀한 삶과 생각을

밝히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진실된 문장과 이야기인지,

어떠한 감정을 추출하고 획득해내기 위한 작위가 없었는지- 나와 독자에게 모두-

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꾸밈을 유혹받는 데서 오는,  혹은 필연적인 착오를 무릅써야 한다는

한계에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 또 언제나 문학과 남자로 수렴되고 마는 나의 편협함에서 생기는 가벼운 수치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글 읽기/쓰기와 남자,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것)


'Auto' 中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작인 'Auto'는 이 책의 시작을 열고,  종국에는 마침표를 찍는 작품으로 느껴졌다.


p. 206~209


우리의 대화는 사방으로 튄다. 그러나 미래와 잡job 이라는 일정한 자기장 속으로 이내 모여든다.

나는 그/그녀들의 세계에서 도망친 것을 무척 뿌듯해하면서도, 하나둘 안정적이 되어가는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아주 잠시 진심으로 후회한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조교 일 하는 거 구십구만원 준단다. 그래도 그거라도 하면 글쓰고 해야지 뭐 우짜겠노."

  우리는 서로 불행이나 불안을 경쟁하고 웃고 위로하고 떠든다. 그것은 우습게도 퍽 즐거운 일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상상마당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맞은편 탑텐 매장으로 들어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살짝 더 비싼 생일 선물을 그녀에게 건넨다. 친구가 미소 지으며 투자냐고 물어온다. 탄력을 받은 우리는 와이즈파크에 들어가 믹쏘와 유니클로와 원더플레이스를 둘러보고, 내친김에 에프터에이랜드까지 들어간다.

 농협 파이팅! 신춘문예 파이팅! 그녀는 나와 광화문 트윈타워에서 산 커피를 손에 쥐고 서울역에서 헤어진다. 친구의 배웅을 끝내고 나는 공항철도를 타고 공덕으로 간다. 그리고 플랫폼을 서성이며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린다. 그는 피곤하고 잘생긴 얼굴을 하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고, 우리는 홍대로 향한다. 오늘따라 카페 룰루랄라는 만원이다. 커피를 마시며 나는 오늘 만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내렸다 그쳤다 하던 비가 이제는 꾸준히 쏟아진다.

  나는 마주 앉은 애인을, 영화와 책은 물론 취미랄 것도 없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난 여름 우리는 '서울에서 함께 살아남기'라는 목표를 정했다. 나는 서울을 떠날 수 없고, 내가 떠날 수 없기에 그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세속적인 욕망을 포기할 의사가 없으며, 문화 예술적-지적 허영의 인프라를 아직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했다고 말해온 터였다. 나의 길티 플레져인 이 아름답고 천박한 도시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또 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있다.

 나는 그를 만나고 난 이후 글을 쓰기보다 그저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나이브해지는 나의 모습에 '삶은 예술보다 언제나 큰 법이지'와 같은 말로 행복한 삶이 더 우선이라 자위해보기도 한다. 욕심을 부려가며 이만큼 배웠으면 되는 거 아닐까? 고급독자, 아니 예술이라는 게 좋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자문은 수도 없이 해보았다. 한편, "불행한 삶을 사는 대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길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하는 문학 선생님의 말에 망설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던 예전의 나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중략)


그와 헤어지고 도서관 6번 자리에 돌아와 워드 창을 연다.  (중략)

재미있는 것은 그 모든 가능한 미래에 영화와 문학이 없는 순간은 없다는 것이다. 끔찍하고 행복하다.


p.218


그 누구의 글도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이, 쓸 수 있다는 사실만이, 하얀 화면에 쌓여가는 글만이, 정말이지 아주 조금 나를 위로해주었다.


(중략)


글쓰기와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했고,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와의 사랑이 끝난 지금, 끝나가는 지금,

나는 반쯤 용기를 잃었다.


 p. 246


다른 입구를 찾아 고개를 돌리 순간, 두 개의 시청 건물 앞에서,

플라자호텔을 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가득찬 시청 광장에서,

나는 텅 비어버린 유년의 로터리를 보고 있었다.

보고 말았다. 나는 거의 얼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짧았을 것이고,

여느 때처럼 농담을 하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순간과 순간, 지난 2월 이후 처음으로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그것은 여전히 문학적인 죽음과 삶 사이에서 파생된 감정이거나, 생생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감정은 글을 쓸 수 있겠다,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 글을 쓰고 싶어,

였으며 다른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내가 있었다. 나는 이것이 『옛날 사람들』의 끝이 되리라 예감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시절이 떠올랐다

때로는 학관 벤치 앞에서

때로는 캠퍼스 앞 전통 술집의

 후미진 한 구석에서

소소한 언쟁을 벌이고

때로는 일부로 신촌과 이대, 홍대 등지의

아트 영화 등을 찾아다니며

호언장담했던 그 시절을

 그 시절 내가 기꺼이

감내하겠다 다짐했던

과거의 흩어진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못한 고향이자

문화 예술의 지적 허영의 인프라이자

길티 플레저의 도시인

서울에 대한 나의 그 마음을

적확하게 묘사한 문장을 보고 뜨끔했다

 

이제 곧 음력 설이다.

세밑, 여러모로 스산한 마음을 책 한권으로

달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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