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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Jan 14. 2019

[달.쓰.반] 84편 /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소설집 / 창비 / 2018년 11월 출간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84

올해 신년 모임에서

'사다리'타기로 만나게 된 책은

정세랑의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였다.


책을 읽다가 조금 울컥했던 장면이 있었는데,

몇 구절 옮겨적어본다.


p. 132

집에 돌아와서는 언니의 칫솔을 버렸다.

매일 아침 거기 언니의 칫솔도 있었고,

아빠도 엄마도 그 칫속을 계속 보고 있었을 텐데

아무도 버리지 않아서, 나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버려버렸다.

며칠 반응을 살폈는데 칫솔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암묵적인 승인하에, 흩어진 언니의 물건들을 언니 방에 숨기고

버리고 처리하기 시작했다. 언니 방에 들어가면

항상 눈물 냄새가 났다. 없는 냄새를 맡는 나에게도

어딘가 이상이 생긴 걸 수도 있지만,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분명 눈물 냄새가 났다. 엄마인지 아빠인지 그 방에서

우는 게 틀림없었다. 바닷바람의 소금기와는 다소 다른,

희미하고 슬픈 동물성 소금 냄새 때문에 나는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p. 135

보늬, 연하한테 먹혔구나?

이름을 막 부르면 푸르푸르르 하던 언니였지만

죽고 없으니 내 마음이야.

웃을 때마다 안쪽에 고인 끔찍한 것들이 몇 그램이라도 휘발되길 바랐다.


p. 138

전시 직전에 완성된 3D 돌연사.net은 꽤 아름다웠다.

규진의 지인이 솜씨를 부려놓아 말머리성운을 옮겨둔 것 같았다.

원형으로 가벽을 세운 전시장 가장자리를 따라

VR기기를 주욱 매달아 놓은 관객들이 써볼 수 있게 했다.

공개 전날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써보았다.

몇걸음 서성거리지 않았는데, 가운데 딱 좋은 자리에서

빛나는 언니 이름이 보였다.

언니의 관계망이 언니를 그 좌표에 둔 것인지,

아니면 규진이가 언니를 중심으로 돌연사.net을

뜨개질한 것인지 가볍게 궁금해졌다.

21세기에 죽는 사람들은 결국 다 데이터가 될 거란 생각도 했다.


수록작 중에서 제일 흥미롭게 읽었던 작품은

<알다시피, 은열>이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고 나오는데,

역사적 상상력이 결합된 작품이라

더욱 재밌게 읽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일부 내용이다.


p. 69

처음의 미세한 스파크는,

관계사 세미나를 위해 가왜(假倭)에 대한 자료를 발견한 한 구절에서 발생했다.

가왜란 고려 말부터 조선에 걸쳐 수탈에 지친 백성들이 거짓으로

일본계 해적인 척 하며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경우를 칭하는 말로,

드문드문 남아 있는 관련 사료를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그 한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가여운 백성이 산과 바다와 계곡에 모여 거짓으로 왜적이라 칭하니, 한탄할 뿐이다.

이와 달리 은열(隱熱)과 그 휘하의 무뢰한 들은 실제 왜인들과 청인들을 끌어들여 서쪽 섬들을

잠식하여 그 위세가 두려울 정도다.

                             - 『청도문집(淸刀文集)』


p.70

은열은 고아였다.

그냥 고아가 아니라 홍경래의 난에서 살아남은 고아였다.

고아들을 모두 이끈 고아였다.

나는 가끔 홍경래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어린 은열을 생각한다.

물론 절대 그랬을 리 없겠지만,

이건 결코 역사적인 상상이 아니지만,

상상 속의 씰루엣은 점점 더 세밀해진다.


p. 84~85

어쩌면 나는 내가 믿는 것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 말았어야 할 투사를 계속 하고 있는지도.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성격을 설명하려고 했고,

당사자들은 전혀 품지 않았던 근대적인 생각들을 멋대로 뒤집어씌웠으며,

은열을 무슨 여선자의 이미지로 그렸고,

정말은 의로웠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

의적 집단으로 교묘하게 테두리를 쳤다.

약탈, 방화, 살인의 흔적은 과장과 위조였다고 무시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소름끼치는 건 그들이 세명이 아니라,

규모를 갖춘 집단이었단 사실을 자꾸 잊는다는 점이다.

시대착오적인 영웅 중심 기술에 언제나 반감이 있었는데도 그러고 말았다.

영웅도 아닌, 난폭했던, 죽고 없는, 내가 모르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여백은 채울 수 없고, 채워서도 안되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규정지을 수 없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비웃게 된다.


표제작인 <옥상에서 만나요>는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시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p.116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운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그러고보니,  아홉작의 수록작 모두

'시스터'에 관한 이야기들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편집은 장편소설에 비해 읽기가

좀 버거운 편인데,

이 책은 출퇴근 시간에 짬짬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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