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소설집 / 창비 / 2018년 11월 출간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84
올해 신년 모임에서
'사다리'타기로 만나게 된 책은
정세랑의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였다.
책을 읽다가 조금 울컥했던 장면이 있었는데,
몇 구절 옮겨적어본다.
p. 132
집에 돌아와서는 언니의 칫솔을 버렸다.
매일 아침 거기 언니의 칫솔도 있었고,
아빠도 엄마도 그 칫속을 계속 보고 있었을 텐데
아무도 버리지 않아서, 나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버려버렸다.
며칠 반응을 살폈는데 칫솔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암묵적인 승인하에, 흩어진 언니의 물건들을 언니 방에 숨기고
버리고 처리하기 시작했다. 언니 방에 들어가면
항상 눈물 냄새가 났다. 없는 냄새를 맡는 나에게도
어딘가 이상이 생긴 걸 수도 있지만,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분명 눈물 냄새가 났다. 엄마인지 아빠인지 그 방에서
우는 게 틀림없었다. 바닷바람의 소금기와는 다소 다른,
희미하고 슬픈 동물성 소금 냄새 때문에 나는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p. 135
보늬, 연하한테 먹혔구나?
이름을 막 부르면 푸르푸르르 하던 언니였지만
죽고 없으니 내 마음이야.
웃을 때마다 안쪽에 고인 끔찍한 것들이 몇 그램이라도 휘발되길 바랐다.
p. 138
전시 직전에 완성된 3D 돌연사.net은 꽤 아름다웠다.
규진의 지인이 솜씨를 부려놓아 말머리성운을 옮겨둔 것 같았다.
원형으로 가벽을 세운 전시장 가장자리를 따라
VR기기를 주욱 매달아 놓은 관객들이 써볼 수 있게 했다.
공개 전날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써보았다.
몇걸음 서성거리지 않았는데, 가운데 딱 좋은 자리에서
빛나는 언니 이름이 보였다.
언니의 관계망이 언니를 그 좌표에 둔 것인지,
아니면 규진이가 언니를 중심으로 돌연사.net을
뜨개질한 것인지 가볍게 궁금해졌다.
21세기에 죽는 사람들은 결국 다 데이터가 될 거란 생각도 했다.
수록작 중에서 제일 흥미롭게 읽었던 작품은
<알다시피, 은열>이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고 나오는데,
역사적 상상력이 결합된 작품이라
더욱 재밌게 읽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일부 내용이다.
p. 69
처음의 미세한 스파크는,
관계사 세미나를 위해 가왜(假倭)에 대한 자료를 발견한 한 구절에서 발생했다.
가왜란 고려 말부터 조선에 걸쳐 수탈에 지친 백성들이 거짓으로
일본계 해적인 척 하며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경우를 칭하는 말로,
드문드문 남아 있는 관련 사료를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그 한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가여운 백성이 산과 바다와 계곡에 모여 거짓으로 왜적이라 칭하니, 한탄할 뿐이다.
이와 달리 은열(隱熱)과 그 휘하의 무뢰한 들은 실제 왜인들과 청인들을 끌어들여 서쪽 섬들을
잠식하여 그 위세가 두려울 정도다.
- 『청도문집(淸刀文集)』
p.70
은열은 고아였다.
그냥 고아가 아니라 홍경래의 난에서 살아남은 고아였다.
고아들을 모두 이끈 고아였다.
나는 가끔 홍경래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어린 은열을 생각한다.
물론 절대 그랬을 리 없겠지만,
이건 결코 역사적인 상상이 아니지만,
상상 속의 씰루엣은 점점 더 세밀해진다.
p. 84~85
어쩌면 나는 내가 믿는 것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 말았어야 할 투사를 계속 하고 있는지도.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성격을 설명하려고 했고,
당사자들은 전혀 품지 않았던 근대적인 생각들을 멋대로 뒤집어씌웠으며,
은열을 무슨 여선자의 이미지로 그렸고,
정말은 의로웠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
의적 집단으로 교묘하게 테두리를 쳤다.
약탈, 방화, 살인의 흔적은 과장과 위조였다고 무시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소름끼치는 건 그들이 세명이 아니라,
규모를 갖춘 집단이었단 사실을 자꾸 잊는다는 점이다.
시대착오적인 영웅 중심 기술에 언제나 반감이 있었는데도 그러고 말았다.
영웅도 아닌, 난폭했던, 죽고 없는, 내가 모르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여백은 채울 수 없고, 채워서도 안되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규정지을 수 없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비웃게 된다.
표제작인 <옥상에서 만나요>는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시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p.116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운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그러고보니, 아홉작의 수록작 모두
'시스터'에 관한 이야기들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편집은 장편소설에 비해 읽기가
좀 버거운 편인데,
이 책은 출퇴근 시간에 짬짬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