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박찬욱 / 영화 <의혹의 그림자> ,히치콕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88
※ 주의 : 이 리뷰에는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과 영화 <의혹의 그림자>의
주요내용 및 반전, 결말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감상했던 영드와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모두 찰리다.
현재 채널A에서 방영되고 있는 박찬욱 연출의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은
왓챠플레이에서도 6부작 전편을 볼 수 있는데,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주연 배우인
플로렌스 퓨가 주연을 맡아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리틀 드러머 걸>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원작자인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인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원작 소설은 읽지 못했지만
이 동명의 영화 역시 재미있게 본 터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왓챠플레이를 통해 공개된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은 영국 BBC와 미국 AMC에서 방영되었던 버전에 비해
감독의 연출 의도를 오롯이 담아낸 버전이라고 한다.
<리틀 드러머 걸>의 주인공인 찰리(차미언 로스)는 영국의 무명 배우로,
어느날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극단 동료들과 함께 그리스로 초빙된다.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막 사랑에 빠지려는 찰나,
그가 실은 이스라엘 정보국(모사드) 요원인 가디 베커이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자신을 스파이로 캐스팅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쇼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찰리는 분노하지만,
모사드의 고위 요원인 마틴 쿠르츠는
평범하고 지루한 현실보다는 짜릿한 픽션의 세계에 살고 싶어하는
찰리의 속내를 꿰뚫어본다.
결국 찰리는 이 쇼의 주인공이 되기로 결정한다.
찰리가 맡은 역할은 모사드와 대적하는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스트, 미셸(쌀림)의 연인.
이를 위해 찰리는 가디로부터 미셸의 인생사를 듣기도 하고,
모사드에 체포된 온 미셸의 나신을 보며 그의 신체 부위에 대한 정보도 습득한다.
이 과정에서 찰리는 혼란을 느끼게 되는데
가디로부터 전해듣는 미셸의 스토리, 그리고 가디의 숨겨진 속내가
대사와 행동 등을 통해 중첩되면서
찰리는 자신을 이 쇼로 이끈
가디의 본심을 알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픽션 속 연인인 미셸(쌀림)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이 싹트게 된다.
찰리의 혼란스러운 내면은 좀 더 그럴듯한 픽션을 완성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스트 훈련소로 잠입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그곳에서 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아랍어를 배우기도 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그녀를 팔레스타인에 잠입시킨 모사드 요원 중 일부는
찰리가 자신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냐고 단정짓기도 했는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찰리의 혼란스러운 내면이 느껴져서
나 또한 그녀가 종국에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가디로부터 쌀림의 형이자 지도자인
칼릴을 유혹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찰리가 느낀 뼈 속 깊은 배신감이
"그 사람은 멋진 사람이다"라는 대사에서 확 느껴졌다.
그 장면은 동시에 그 말을 전하고 있는
가디의 이중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찰리는 칼릴을 유혹하는데 성공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칼릴의 추궁에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때맞춰 등장한 가디와 모사드 요원들에 의해 구출되고,
칼릴은 총에 맞아 즉사한다.
이때 찰리는 진심으로 칼릴을 위해 운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찰리가 주연인 "쇼"는 제 1막의 막을 내린다.
(이후 극중에서는 몇몇 장면이 더 있긴 하지만)
나는 이 스토리를 그 누구든 사랑할 수 있고,
그 누구로든 분할 수 있는 "배우"의 이야기로 봤다.
감독도 찰리가 배우라는 점에 중점을 둔 것 같다.
마틴 쿠르츠가 찰리와 첫 대면하는 장면의
자신을 쇼의 연출자이자 기획자라고 소개하는 대사에서,
이것은 허구의 픽션을 진실로 믿게끔 만들어야 하는
배우의 과업을 찰리한테 주는 장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찰리는 행복했을까?
그녀는 자신이 주연을 맡은 이 "쇼"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을까?
쌀림을 죽이고,
결국 칼릴을 처단하는 데까지 성공하는모사드 요원들을 보면서
찰리가 느낀 분노와 미안함은
플로렌스 퓨의 연기를 통해
절절하게 다가왔다.
이 드라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그리고 여기에 원인을 제공한 영국 등 배경이 되는 국제 정세를 알아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mbc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을 통해
이스라엘괴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의 원인과 현주소에 대해
조금이나마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의혹의 그림자>에서도 찰리가 나온다.
그녀 또한 <리틀 드러머 걸>의
찰리처럼 뻔하디 뻔한,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큰 소녀다.
그녀는 이런 일상의 돌파구로 자신과 이름이 같은, 엄마의 남동생인 찰리 삼촌을 찾는다.
자신이 멋쟁이 찰리 삼촌을 생각하던 바로 그때,
삼촌에게서도 그녀의 집에 방문할 것이라는 전보가 도착하고
찰리는 텔레파시가 통했다며 좋아한다.
찰리 삼촌과 외출한 찰리는 우연히 만난 친구들의 삼촌에 대한
곁눈질에 의기양양하며 모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자신이 미소지으며 캐고 싶어하던,
삼촌의 특별한 '비밀'에 대해 알게 된다.
멋쟁이 찰리 삼촌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찰리.
아마도 찰리가 상상하는 픽션 속의 찰리 삼촌은 특별한 비밀은 간직한,
현재 보여지는 모습보다
더욱 멋진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지닌 그 특별함은 그녀가 생각조차 못하던 것이었다.
바로 찰리 삼촌은 연쇄 살인마였던 것이다.
쌍둥이 같은 존재라며 따랐던 삼촌의 비밀을 알게 된 찰리는 큰 충격에 빠진다.
찰리에게 비밀을 들켜버린 찰리 삼촌은 그녀를 식당으로 데려가
입을 다물라고 협박한다.
찰리는 자신을 협박하고, 여러 번 죽이려드는 찰리 삼촌에게
빨리 집을 떠나지 않으면,
자신이 삼촌을 죽일 것이라고 응수한다.
결국, 집을 떠나는 날 배웅 나온 찰리를 기차에서까지 떨어뜨려 죽이려던
삼촌의 계획은 실패하고,
도리어 자신이 기차에서 떨어죽고야 만다.
두 인물의 이름이 "찰리"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것,
그리고 우린 쌍둥이와 같은 존재라는 대사 등을 통해 본다면
두 명의 찰리는 인간 내면의 선과 악, 이라는 양면적 대립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픽션과 현실의 기로에 서있는 소녀의 이야기로 생각했다.
찰리 삼촌에게 받은 선물로 받은 반지는
알고보니, 찰리 삼촌이 죽인 피해자의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였다.
멋진 반지를 선물해주는 다정한 삼촌은
찰리가 상상하던 픽션 속의 인물,
혹은 그 픽션을 완성해주는 존재였지만
그 실체는 돈많은 과부를 죽이는 연쇄살인마였던 것이다.
찰리 삼촌이 죽은 뒤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찰리는
지루하고 뻔하다고 불평했던, 현실에 이제 만족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비밀이 숨어있는, 새로운 픽션을 상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