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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쓰.반] 12편 파리대왕과 캡틴아메리카 시빌워

소설

by 이야기술사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금요일의 리뷰 No.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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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말에 개봉한 영화 <캡틴아메리카: 시빌워> 는

질서와 자유가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

라는 난제를 다루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을 믿고 자유를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은 본디 악하기 때문에 규칙과 규범으로 통제해야 하는가?


자유분방한 토니 스타크(아이언맨)는 통제에 의한 질서를 주장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모범생 스티븐 로저스(캡틴 아메리카)는 이에 반대하며 자유를 주장한다.


그런데 어벤져스 내부의 이러한 갈등을 보며

떠오른 소설 한 권이 있다.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은 인간이 만든 규칙이나

규범이 없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인간의 야만성이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흥미롭게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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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군상과 사회에 대한 탐구 보고서, 파리 대왕


<파리대왕>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무인도라는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묘사하여 인간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각각의 인물은 상징적이다. 그 인물들은 우리 인간의 본성과 우리가 속한 세계를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이기 때문이다.



잭은 <자연>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연>이라는 것은 본래 인간의 본성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잭이 상징하고 있는 <자연>은 본래의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잭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사이먼과 돼지를 살해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자연은 왜곡된 자연이다. 잭은 자신 내면의 금기시된 욕망을 억누르지 못했다. <파리대왕>의 배경이 되는 무인도에 만약 잭 혼자만 존재했다면 잭은 완벽한 존재였을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한다.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숙명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단어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또한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랠프


잭이 왜곡된 <자연>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랠프는 왜곡된 <문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랠프는 소년들에 의해 무인도의 지도자로 선출되지만 결국 잭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다. 자기 내면의 금기를 파괴하면서까지 스스로 생존의 돌파구를 마련하여 자기 노선을 확실히 구축하고 있는 잭의 무리하고는 달리 랠프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방황하고 있다. 잭의 무리가 <사냥>이라는 자신들의 노선을 확실히 구축할 동안 랠프는 <연기>에만 집착할 뿐이다. 물론 그들이 구조되기 위해선 연기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랠프는 그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생존 방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지도자일 뿐이다. 스스로 랠프를 지도자로 선출한 소년들이 왜 잭 쪽으로 자신들의 노선을 바꾸려 하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필요한 것은 <불>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준 것처럼. 그러나 그 <불>은 무엇을 밝히고자 함인가? 문명을 밝히기 위해선 우선 땔감이 필요한 법이다. 제때에 땔감을 공급하지 못한 채 환한 불을 밝히라 명령하는 랠프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놓여있는 왜곡된 문명을 상징한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뱃속으로는 인육을 먹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랠프의 모습에서 우리는 풍랑에 휩싸인 문명의 배를 지휘하는 무능력한 선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돼지와 사이먼


돼지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지식인의 대표적인 모습이고 사이먼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죄악을 보고 회개를 촉구하는 성직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왜곡된 자연과 왜곡된 문명 사이에서 이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하고 올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이들이 추구하는 세계가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내부의 잔악한 본성이, 우리 외부의 무능력함이 이들을 희생자로 만든 것이다.


언론과 권력, 인간 사회의 여러 가지 단면들


<소라>를 쥔 사람은 발언권이 있다. 소년들은 <소라>를 쥐고 자신의 의견을 얘기한다. 따라서 소라가 갖는 지위는 무인도에선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소라>는 일종의 언론인 셈이다. 그러나 소라의 발언권은 차츰 무시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선 우선 언론을 통제해야 한다. 잭은 소라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소라의 권위가 떨어지고, 소년들의 자발적인 조직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잭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랠프가 아무리 외쳐보아도 그의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잭은 오랑캐 패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들은 이제 창을 들고 서 있는 견고한 위협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돌격하는 의사를 굳히고 있었다. 이내 그런 기세를 보였다. 좁은 골목에서 적을 물리치리라. 랠프는 한쪽으로 조금 비켜서서 창을 꼬나든 채 그들과 맞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나약한 소라를 부적처럼 들고 돼지가 서 있었다.(제11장 p271)


그들은 이제 서로 적이 되었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선 구성원들의 상호 소통이 중요하다. 그러나 상호 소통이 불가능해진 섬에선 더 이상의 조직을 지탱할 힘이 없다. 무질서 속에서 인간의 이성은 흔들리기 마련이며, 그때 인간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식인으로 묘사된 돼지의 안경이 깨지는 장면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 깨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며 소년들의 잭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결국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공포에 대한 두려움


소년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짐승>의 존재이다. 잭은 <사냥>이라는 의식으로 그들의 감정을 적절히 이용한다. 사실, 소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 내면에 숨어있는 어둠이다. 어쩌면 짐승은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시체가 아니라 돼지머리의 새까만 아가리 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이다. 소년들의 사악함은 암퇘지의 도살 장면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더위에 녹초가 된 암퇘지는 쓰러졌다. 소년들은 마구 덤벼들었다. 이 미지의 세계로 부터의 무시무시한 습격에 암퇘지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비명을 지르고 뛰어오르곤 했다. 온통 땀과 소음과 피와 공포의 난장판이었다. 로저는 쓰러진 돼지 주위를 달리며 돼지 살이 드러나 보이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창으로 찔렀다. 로저는 마땅한 곳을 찾아서 제 몸무게를 가누지 못해 자빠질 정도로 창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창은 조금씩 밀려 들어가고 겁에 질린 암퇘지의 비명은 귀가 따가운 절규로 변하였다. 이어 잭은 목을 땄다. 뜨거운 피가 두 손에 함빡 튀어 올랐다. 밑에 깔린 암퇘지는 축 늘어지고 소년들은 나른해지며 이제 원을 풀었다. 나비들은 여전히 공지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제8장 p202)


사이먼은 진짜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이성의 옷을 벗어던진 소년들에겐 이젠 진실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한순간을 즐길 수 있는 피의 제전과 그 제전에 쓰일 제물이 필요할 뿐이다. 사이먼이 산 위에 있는 사람의 시체에 대해 말하려고 하자 그들은 사이먼을 짐승으로 몰아 살해하고야 만다.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그놈을 죽여라!]

막대기가 내려 퍼부어지고 새로 운을 그린 소년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 짐승은 원형의 한가운데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짐승은 고함소리 에지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자꾸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중략)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주먹질을 했다. 물어뜯고 살을 찢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빨과 손톱으로 물어뜯고 할퀼 뿐이었다. (제9장 p228)


이 장면 또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진실을 얼마나 외면하려고 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실을 외면하려 할 때 자기 자신의 내면과 마주치는 공포는 얼마나 클 것인가? 사이먼은 소년들의 공포가 불러온 비극이었다.


파리 대왕의 의미


<파리대왕>은 인간의 악마성을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 본성의 악마성을 말하고 있다. 발생의 근원지를 모르고 꾸역꾸역 돼지머리로 몰려드는 파리떼들. 우리의 피 속에서 맴돌고 있던 파리들도 우리의 검은 심장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보여준다. 이 소설은 대조되는 인물이나 사물을 통해 선악의 경계를 때로는 선명히 때로는 모호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채 야만성에 의존하는 잭의 무리들을 분명히 <선>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랠프와 돼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이먼 살해 사건의 방조자, 아니 참여자가 아니었던가? 이 소설은 이렇듯 인간 본성에 교묘히 내재되어 있는 <악>을 소년들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우리의 본성을 악이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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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파리대왕과 비교해서, 볼 만한 영화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비치>가 있다. 환상의 낙원을 꿈꾸었고 마침내 그곳을 찾아낸 리처드(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리처드는 이미 낙원에서 공동체 이루고 살던 무리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결국 마주하게 된 진실. 그들이 낙원이라고 느낀 그곳은 정말 문명 세계으로부터 벗어난 평화의 낙원이었을까?


자신이 꿈꾸고 바라던 낙원이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리처드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된다. 대니 보일 감독은 파리대왕과 결이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지만, 영화 <비치>는 골딩의 <파리대왕>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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