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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Nov 21. 2019

[달쓰반]98편/뮤지컬,영화,소설로 보는 레베카/스포有

뮤지컬 레베카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19. 11/16~3/15)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문화 리뷰 No. 98

※ 주의 : 이 리뷰는 뮤지컬,영화, 소설 <레베카>의 주요 내용 및 결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뮤지컬 레베카의 다섯번째 시즌의 막이 올랐다.

지난 11월 16일, 다섯번째 시즌의 첫 공연이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렸다.



뮤지컬 <레베카>는 1938년에 출판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원작 소설을

극작가 미하엘 쿤체가 각본과 작사를,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음악을 맡아

제작한 것으로, 11월 16일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공연에는 원작자인 미하엘 쿤체가 무대에 올라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레베카>는 그동안 텔레비전, 영화 등 여러 버전의 영상 매체로도 각색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40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이다.

로렌스 올리비에, 조안 폰테인, 주디스 앤더슨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열연하였으며 그해 아카데미 최고 작품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레베카>의 원작 소설과 영화, 뮤지컬의 기본 뼈대는 같지만

화자인 '나'의 성격이 미묘하게 다르므로,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후

반 호퍼 부인의 말동무 노릇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21살의 '나'는

어느날 반 호퍼 부인을 따라오게 된  몬테카를로에서 잘 생기고 돈많은

42세의 귀족 남성 막심 드 윈터를 만난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지적이며,

'칼날 같은 미소'를 지녔다는 레베카는

그의 전 부인으로, 작년 여름 보트가

바다에 빠지는 익사사고를

당해 죽었다.  나와 막심은 몬테카를로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나는  어릴 적 그림엽서에서 봤던,

선망의 대상이던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 되었지만 그곳에는 레베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있다. 특히 맨덜리저택의 살림을 맡고 있는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와 '나'를

계속 비교하며, '나'의 숨통을 조여온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레베카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032976/mediaindex?ref_=tt_pv_mi_sm

p.24

그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15세기의 도시,

좁은 골목 자갈길이 이어지고

뾰족탑이 솟았으며 모두들 모직 타이즈에

 앞이 뾰족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 그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은 중세의 느낌을 풍겼다 .

미술관에서 본 '익명의 신사' 초상화가 떠올랐다. 영숙식 트위드재킷 대신

검은 바탕과 목과 손목에 레이스가 달린 옷으로 바꿔 입히기만 하면 먼 과거,

망토 두른 남자들이 낡은 건물 그림자 속에 서 있고

좁은 계단이 지하 감독으로 이어지며 결투용

칼이 챙그랑 소리를 내던 그 과거에서 오늘날의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림 속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을 듯 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나'는 중세 귀족 같은 외모를 지닌

막심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느낀 것 같이 보이는데

막심은 '나'를 정말로 사랑해서 청혼한 것인지

아니면 비어있는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 자리를 급히 채우기 위해

청혼한 것인지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조금 있었다.


p.86-87


"나 혼자 들어가서 이야기를 끝내는 게 좋겠소.

다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군. 당장 결혼해도 괜찮겠어요?

혼수니 뭐니 하는 멍청한 짓거리는 필요 없소. 그러니 단 며칠이면 충분해요.

필요하면 증면서만 떼어 관청에 가서 신고하고 베니스든 어디든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당장 떠납시다."

"교회에 안 가고요? 웨딩드레스는요? 들러리도 합창단도 없이요? 당신 친척이나 친구들은요?"

내가 물었다.

"그런 건 생각하지 마요. 난 이미 그런 결혼식을 한 번 치렀으니."


로렌스 올리비에가 막심을 연기하는 영화 <레베카>에서는

관공서에서 혼인 신고를 하고 나오면서

거리에서 면사포도 제대로 씌워주지 못했다며

꽃을 선물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결혼식은 한번으로 족하다고 딱

잘라 말하는 원작 소설에 비하면 다정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레베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고백하기 전까지는

영화에서도 막심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댄버스 부인이 '나'를 레베카와 비교하며 옭아매는 장면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이에 비해 뮤지컬에서는 막심과 나의 사이가 더 깊어보였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도 역시 제일 압권인 장면은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가 맨덜리로

돌아오길 바라는노래를 부르며

창문을 열고 나를 안개가 자욱히 서린

바다로 내모는 장면이다.

p.253

"아시다시피 전 그분에게 필요한 일을 다 해드리는 사람이었거든요.

몸종을 여럿 두어봤지만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대니 아주머니만큼 날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까. 아주머니만 있으면 돼.'

그분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자, 보세요. 그분의 가운이에요.

이 길이를 보면 마님보다 훨씬 키가 크셨다는 걸 아시겠지요? 한번 마님한테 대볼까요?

거의 발목까지 내려오려는군요. 그분은 몸매가 아주 아름다웠답니다. 또 이건 그분 슬리퍼예요.

키에 비하면 발은 작았죠. 마님 손을 슬리퍼 안에 넣어보세요. 정말 작지 않나요?"

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내 눈을 응시한 채 억지로 내 손을 슬리퍼 안에 넣었다.

"그분 키가 이렇게 컸을 줄은 모르셨죠? 이 슬리퍼는 작은 발에나 맞는 거죠.

그분은 또 아주 날씬했어요. 나란히 서보기 전에는 키가 큰 줄 모르기 십상이었죠.

거의 저와 똑같을 정도로 컸다니까요. 하지만 이 침대에 누운 그분은 아주 작아보였어요. 풍성한 검은 머리는

마치 후광인 양 그분 얼굴 주위에 펼쳐 있었죠."

댄버스 부인은 슬리퍼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운을 의자에 걸쳐 두었다.

다음은 화장대 차례였다.

"그분 머리빗을 보신 적이 없죠?

자, 그분이 사용하시던 그대로 이렇게 남겨두었어요. 매일 밤마다 제가 빗질을 해드렸지요."

'자, 머리 빗을 시간이야'라고 그분이 말씀하시면 전 이 의자 뒤에 서서 이십분씩 빗질을 했죠.

p.259-260

"비단 이 방뿐만이 아닙니다. 거실, 홀, 정원 곁방까지 전 여러곳에서 그분을 느낀답니다.

어떤가요? 마님께서도 그렇죠?"

댄버스 부인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어느덧 속삭임에 가깝게 낮아졌다.

"때로 이 복도를 걷노라면 그분께서 바로 뒤에서 따라오신다는 기분이 들죠.

그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저는 그 발소리를 확실히 알고

틀림없이 구분해낸답니다. 또 홀 위쪽 발코니에서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개들을 부르는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요. 저녁 식사 하러 계단을 내려가는 그분의 옷자락

소리도 종종 들을 수 있어요."

부인은 여전히 나를 응시한 채 잠시 말을 멈추더니 느릿느릿 덧붙였다.

"어쩌면 그분께서도 지금도 우리를 보고 말을 걸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죽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와 산 사람을 바라본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두 손을 꽉 마주잡았다.

"모르겠어요."

내 목소리 어색했고 이상하게 톤이 높았다.

평소의 내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p.351-352

맥심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나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신혼여행도, 이곳 맨덜리에서의 생활도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남자고 나는 그의 어린 아내이고 그리고 그는 외로웠다는 사실 뿐이다.

그는 내게 조금도 속해 있지 않다.

 온전히 레베카의 것이다.

아직도 레베카 생각을 한다.

레베카가 있으므로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댄버스 부인 말대로 레베카는 아직도 이 집 안에 있다. 서쪽의 침실에, 서재에, 거실에, 홀 위쪽 발코니에.정원 곁방에도 아직 레베카의 비옷이 걸려있지 않은가.정원에,숲에,해변의 돌집에도.레베카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그 향수 냄새가 계단에 어려 있다.

하인들은 여전히 그 명령에 복종하고우리는 레베카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는다.

레케바가 좋아했던 꽃들이 방에 놓인다.

그 침실의 옷장에 걸린 옷들, 화장대 위의 머리빗, 의자 아래의 슬리퍼, 침대 위의 가운.....

레베카는 아직도 맨덜리의 안주인이다.

여전히 드 윈터 부인이다.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이 다 보존되어 있는 이곳을 비틀거리며 헤매는 불쌍한 바보에 불과하다.

p.353

레베카, 레베카, 늘 레베카가 있다. 집 안을 걸을 때나,

어딘가에 앉을 때나,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꿈꿀 때조차도 레베카를 만나게 된다.

레베카의 겉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길고 가는 다리, 작고 좁은 발, 나보다 넓은 어깨, 능숙하게 움직이는 두 손.

레베카는 그 손으로 꽂꽂이를 하고 모형 배를 만들고 시집 속표지에 '맥스에게 레베카로부터'라고 썼다.

계란형의 작은 얼굴에 피부는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고 했지.

좋아하는 향수 냄새도 안다.

 그 웃음소리와 미소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그 목소리리는 구별해 낼 것 같다.

레베카, 레베카.

어느 한 순간도 레베카를 벗어날 수 없다.


p.323

"어서 가서 갈아입어요. 어떤 옷이든 상관없소. 그냥 이브닝드레스면 되오. 자, 누가 오기 전에 어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백짓장 같은 얼굴에서 그의 눈만이 살아 움직였다.

"대체 왜 그렇게 서 있는 거요! 내 말이 안 들리오?"

날카롭고 매정한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p.365

"원하는 결과를 얻으셨군요. 그렇죠?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랐던 거잖아요. 이제 만족하나요? 기쁜가요?


p.367-386

댄버스 부인은 내게 잡힌 팔을 비틀어 빼냈다.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제가 왜 드 윈터 씨의 고통을 배려해야 하죠?

 드 윈터 씨는 전혀 그러지 않는데요.

당신이 그분의 자리에 안고 그분이 다녔던 길을 다니며 그분의 물건을 사용하는 걸 보는 제 마음이 어떠리라 생각하십니까?

아침이면 거실의 그분 책상에 앉아 그분이 쓰던 펜으로 편지를 쓰는 것을, 그분이 맨덜리에 오신 첫날부터 사용하셨던

내선 전화를 당신이 받는 모습을 몇 달이고 지켜봐야 하는 제 심정이 어땠을까요? 프리스와 로버트를 비롯한 하인들이

당신을 '드 윈터 부인'이라 부르면서 '드 윈터 부인은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라거나

 '드 윈터 부인이 오늘 오후 3시에 차를 준비하라십니다'라거나 혹은 '드 윈터 부인은 5시 이후에 들어오셔서 차를 드신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요?

제가 모셨던 드 윈터 부인,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과 미소를 지녔던 진짜 드 윈터 부인은 교회 지하 묘지에 누워 잊혀져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드 윈터씨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건 고통을 받을 만해서 그런 겁니다. 열 달도 지나지 않아 당신처럼 어린 여자와 결혼한 대가로요.

p.371

"신혼여행 때 당신이 드 윈터 씨를 행복하게 했다고요? 아직 어리고 아는 것도 없는 당신이,

기껏해야 딸뻘밖에 안 되는 당신이? 당신이 인생에 대해 뭘 아나요?

남자에 대해 뭘 아나요? 여기 오면 드 윈터 부인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우리 드 윈터 부인의 자리를? 당신이 맨덜리에 처음 왔을 때 하인들조차 비웃었어요.

첫날 저택 뒤편 복도에서 당신이 만난 부엌 하녀조차도요. 드 윈터 씨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신은 맨덜리에 데려왔는지 모르어요. 당신이 처음으로 맨덜리의 저녁 식탁에 앉은 모습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군요."


p.373

"전 알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요."

댄버스 부인이 가까워 다가왔다.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물론 그렇겠죠. 이제 알았나요? 당신은 절대 그분을 이길 수 없어요. 그분은 아직도 이곳 안주인이에요.

진짜 드 윈터 부인은 바로 그분이지요. 그림자이고 유령인 건 그분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아무도 원치 않아 내쳐진, 잊혀져버린 존재가 바로 당신이에요.

자, 그런데도 맨덜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왜 그분께 맨덜리를 맡기고 떠나지 못하지요?"

나는 창문 쪽으로 물러섰다. 다시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다. 댄버스 부인은 내 팔을 붙잡았다.


p.374

정말 쉽지 않겠어요? 어째서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목이 부러진다 해도 고통은 느끼지 못할 거예요.

아주 빠르고 편한 방법이죠. 물에 빠져 죽는 것과는 달라요. 왜 당장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안개가 창밖을 가득 채웠다. 끈적거리고 습한 공기가 내 눈에, 콧구멍 안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창틀을 꼭 잡았다.

"두려워 마세요. 밀어버리지는 않을 테니. 당신 옆에 있지도 않을 거예요. 혼자서도 충분이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대체 당신이 여기 맨덜리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신은 행복하지 않아요.

드 윈터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요. 그러니 살아갈 이유가 별로 없는 거죠? 지금 당장 뛰어내려 끝장을 내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텐데요."


"자, 어서." 댄버스 부인이 속삭였다.

"어서, 두려워하지 마요."

나는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났다. 창틀을 쥔 손가락이 쥐가 났다.

콧구멍과 입술에 닿은 안개가 시큼하고 고약했다.

담요를 뒤집어쓴 것처럼, 마취가 된 것처럼 답답했다.

불행하다는 생각도,맥심을 사랑한다는 생각도 사라질 것이었다.

레베카 생각까지도, 더 이상 레베카를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창틀에서 손을 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 흰 안개와 적막이 갑자기 깨졌다.

폭발음이 들리고 창문이 흔들렸다.


영화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역을 맡은

 주디스 앤더슨의 카리스마도 대단했지만

뮤지컬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역을 소화한 신영숙 배우 또한 무대를 압도했다.

댄버스 부인의 계략으로

레베카가 가장 무도회에 입었던 옷을

똑같이 입게 되고,

이에 막심이 불같이 화를 내자

나는 댄버스 부인에게 따져묻는다.

왜 나를 미워하죠?

뮤지컬에서는 댄버스 부인이 이 대사로 압축해서 말해준다.

감히 너 따위가 레베카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니까

막심이 레베카가 아닌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심약하고 어리숙한 모습에서

 당당하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소설과 영화, 뮤지컬 중 가장 뚜렷하게 행동의 변화를 보이는 캐릭터는뮤지컬이다.

하인들을 시켜 레베카의 가구와 난초를 치우며 부르는 넘버 '미세스 드 윈터는 나야' 에서도

그녀의 변화가 잘 드러난다.

레베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원작 소설과 히치콕의 영화가 조금 다른 방향을 취했고,

뮤지컬은 히치콕의 영화 버전을 택한 것 같다.


p.412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모두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라고 하더군.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며 재능많은 아내를 얻었다고.

제일 까다로운 사람인 할머니마저도 첫눈에 레베카를 좋아했소. 그리고 내게 말씀하셨지.

'레베카는 아내에게 중요한 세 가지를 다 갖췄다. 혈통과 두뇌, 그리고 미모지.'

난 그 말을 믿었소. 아니, 믿으려 했는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때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있었소.

그 여자의 눈빛에는 무언가 있었거든"


막심이 레베카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면은

소설과 영화, 뮤지컬이 거의 비슷하다.


p.414

"그 절벽 위에서 그 여자는 거래를 제안하더군. '내가 저택을 관리해주죠. 당신의 그 소중한 맨덜리를

가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만들어주겠어요.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부러워하며 말하겠죠.

역국을 통틀어 가장 부유하고 행복하며 잘생긴 부부라고 말이에요. 얼마나 신나는 장난이에요!

맥스! 완벽한 게임이죠!'라고 말하면서. 깔깔대고 웃으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꽃잎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말이오."


p.416-417

난 거래에 충실했소. 그 여자의 다른 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오늘과 같은 맨덜리를 만든 건 바로 그 여자 취향이오. 정원, 숲, 행복의 계곡에 있는 진달래까지도.

내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도 그런 모습이었으리라 생각했소? 그때는 버려진 황무지였다고.

나름대로의 자연미와 매력이 있긴 헀지만 정성스러운 손길과 돈을 애타게 기다렸던 곳이지.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해주지 못했소. 레베카가 아니었다면 나도 아마 그냥 내버려두었을 거요.

지금 저택에서 보는 물건 중 절반 정도는 본래 없던 것들이오. 응접실이나 거실은 다 레베카의 작품이지.

관람객들에게 프리스가 자랑스레 보여주는 의자들도, 수놓인 비단벽도 다 레베카가 한 거요.

물론 창고에 처박혀 있었던 물건도 있었소. 내 아버지는 가구나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

대부분은 레베카가 사들였다고 보면 되오. 지금 보는 아름다운 맨덜리, 사람들이 동경하고 사진과

그림으로 간직하는 맨덜리는 모두 레베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소."


2~3시간 안에 내용을 압축해서 보여줘야 하는 영화와 뮤지컬과는 달리

500여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서는 레베카의 면모가 더 자세히 드러난다.

막심의 친구이자 맨덜리저택의 관리인인 프랭크에게

'나'는 레베카가 아름다웠냐고 묻는데,

프랭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제 평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p.417

우리는 그렇게 살았소.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났지. 난 모든 걸 참았소.

맨덜리 때문이었소. 그 여자가 런던에서 어떤 짓을 하든 나하고는 상관없었소.

맨덜리에는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니까. 첫 몇 해 동안에는 그 여자도 조심을 했소.

단 한 마디도 허튼 소문이 없었지. 그러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대담해지더군.

(중략)

자기 친구들을 들이기 시작하더군.

한두 명을 불러 주말 파티를 벌였소.

난 제대로 알지 못했지. 아마 저 아래 해변의 집에서 소풍도 했던 모양이오.

스코틀랜드로 사냥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여자는 거기서 대여섯명이나 되는 친구들과 함께 있더군.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었소.

한 마디 했더니 그 여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러시나'하더군.

난 런던에서는 얼마든지 친구를 만나도 좋지만 맨덜리는 내 소유라고 설명했소.

거래 규칙을 지키라고 말이지.

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씩 웃었소.

그러더니 프랭크를 집적거리기 시작했소.


영화에서 막심 역할을 맡은 로렌스 올리비에는

자신의 부인이었던 비비안 리와 함께 동반 출연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히치콕은 비비안 리는 레베카 그 자체이며,

안타깝게도 레베카는 작품 자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비안 리의 캐스팅을 거절했다고 한다.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 막연히 비비안 리를 연상하며 읽었는데 영화에 관한 후일담을 보게 되었을 때 정말 히치콕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내 생각이 터무니없는 건 아니군, 이란 생각이 들었다.


p.420-421

"그 여자는 파벨이라는 작자와 해변의 돌집으로 가곤 했소. 하인들에게는 배 타러 간다고 하고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지. 사촌과 거기서 밤을 보낸 거요. 다시 한 번 나는 경고했소.

파벨을 내 영지 안에서 보게 되면 바로 쏴버리겠다고 말이오.

그가 맨덜리의 숲 속을 걸어 다니고 행복의 계곡을 지나가는 생각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았소.

절대로 참지 않을 거라고 강조했지. 그 여자는 어깨만 으쓱거렸을 뿐 평소와 달리 독설을 퍼붓지 않더군.전보다 창백하고 수척하며 신경이 날카로운 모습이었소.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갑자기 그 여자가 늙어 보이는 것인지 의아했소."


p.423

그 여자는 탁자 모서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리면서 나를 바라보더군.

'우린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너무 훌륭하게 연기해 내지 않았나?"라면서.

줄무늬 샌들을 신은 그 여자의 발이 앞 뒤로 흔들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오.

내 눈과 머리가 순식간에 뜨거워졌지.

"대니 아주머니와 내가 힘을 합하면 당신을 바보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야.

아무도, 단 한 사람도 당신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그 여자는 가볍게 말하면서 여전히 발을 까닥거렸소. 파랑색과 흰 색 줄무늬 샌들을 신은 그 발을.

그러더니 갑자기 탁자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서더군. 손을 주머니에 넣고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이오.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말이야, 맥스. 당신은 물론이고 세상 그 누구도 그 애가 당신 자식이 아니란 걸 증명하지 못해.


p.424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 말뜻을 당신도 이해했겠지? 멍청한 주민들, 눈먼 소작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어? 늘 바라마지 않던 일이라고 주인 나리에게 축하 인사를 하겠지.

난 완벽한 어머니가 되는 거야. 이제까지 완벽한 아내였던 것처럼.

그 누구도 진실을 모를 거야. 아니, 추측조차 못할걸

그 여자는 창가에 뒤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소.

 미소 띤 얼굴로 한 손은 주머니 속에, 다른 한 손은 담배를 쥐고 있었지.

내가 죽여버렸을 때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소. 총알은 정확히 그 몸을 관통했다오.

그 여자는 금방 쓰러지지 않았소.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소...."


p.425

"난 생각을 못했소." 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지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이 총에 맞으면 그토록 피가 많이 흐른다는 걸 말이오."

(중략)

시체를 끌어내 보트에 실었소. 그때가 아마 11시 30분 정도, 12시가 다 되었을 거요.

사방이 캄캄했지. 달도 없었소. 바람은 서쪽에서 거세게 불어왔소.


원작 소설에서는

레베카가 막심과의 거래 규칙을 깨고

그녀의 사촌인 파벨을 끌어들여 밀회를 즐긴 것에

분노한 심이 레베카에게 총을 쏜다.

이로 인해 레베카가 죽자

당황한 막심이 그녀의 시체를 보트에 태워 사고사로 위장하지만

영화와 뮤지컬에서는 레베카와 막심이 다투다가,

레베카가 사고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레베카가 막심을 도발한 진짜 이유는

파벨이 짐작한 그녀의 임신 때문이 아니라,

레베카가

암으로 인해 여명 6개월을 진단받은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소설에서는 나와 막심이 베이커 의사의 집에

 같이 찾아가서

레베카의 숨겨진 진실에 대해 알게 되지만

영화에서는 내가 맨덜리 저택에 남고,

막심과 파벨, 프랭크가 함께 베이커 의사를 찾아가는 설정이다.

뮤지컬에서는 파벨에 의해 살인 용의자로 몰린

막심이 맨덜리 저택에 남고  내가 베이커 의사를 찾아가 레베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아이를 가지면 아무도 당신 애가 아니란 걸 증명 못해. 당신의 소중한 맨들리를 상속받을 애를 갖고 싶지? 그러곤 소리내 웃더군. 재미있지 않아? 완벽한 아내 역도 해냈듯 완벽한 엄마 역할도 자신있어.
내 아들이 커서 당신이 죽은 뒤에 맨덜리를 갖게 되면 당신은 피가 끓겠지?
그녀는 내 얼굴을 마주보고 서서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엔 담배를 든 채 미소 지었지. 맥심, 이젠 어쩔 거야? 날 죽이고 싶지?


잠깐 정신이 나가 한 대 쳤던 것 같소. 레베카는 서서 날 응시하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가오더군. 그러다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어. 잠시 후 내려다보니 바닥에 누워 있었어. 배에서 쓰는 연장에 머릴 부딪혔더군.


나 : 당신이 죽인 게 아니에요. 그건 사고였어요.
맥심 : 그 말을 누가 믿겠소? 정신이 없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를 배로 옮겼지.
맥심 : 내가 그녀를 죽인 게 아니네. 그녀가 날 속였어. 내 손으로 죽이게 한 거야. 모든 걸 예상했던 거야. 그래서 그런 웃음을.
파벨 : 대니, 전할 소식이 있어. 레베카가 우릴 농락했어. 암에 걸려 있었대. 그래, 자살한 거야.이제 맥심은 귀여운 새색시랑 맨들리에서 행복하게 살겠지. 잘있어, 대니


  영화 <레베카> 대사


뮤지컬 <레베카>

칼날 같은 그 미소  中 


나는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았어!   

참을수 없을 만큼 교활하고 뻔뻔한, 사랑이라곤 전혀 모르는 여자!
아무도 몰랐던 그녀의 속마음
어쩜 그리 다 감쪽같이 속였나
실은 나도 당했던 것
세상 남자 그 미소에 다 굴복 당했지
상냥한 말솜씨 그 매력에
칼날처럼 찬웃음 날 녹여버렸어
전부 잊을 수 있어도
지울 순 없는 그녀 미소
우리함께갔던 절벽
그녀와도 갔어
몬테카를로에서 우린 거랠했지
차갑게 웃으며 내게 속삭였어
 네 아내 노릇 해줄테니
딴 남자랑 놀 땐 나를 건들이지마
난 사람들 눈이 두려워
더러운 계약을 했어
이혼은 우리 집안의 금기 그년 알았던 거야
가족의 명예를 위해
뭐든 할수밖에 없다는걸
칼날처럼 찬 웃음
날 녹여버렸어 전부잊을 수 있어도
지울 순 없는 그녀 미소
(중략)
난 말했어
넌 우리의 계약을 깼어
더 이상은 못 참겠어 이 뻔뻔한 인간
말 좀 해봐
그 때 그녀 날 비웃으며 내가 물었지
나 만약 아일 가졌다면 어쩌실래
세상이 당신 애라 믿겠지 맨덜리의 유일한 상속자
완벽한 당신 아내는 완벽한 엄마 될거야
그럼 당신은 멍청한 아빨 연기해줘
칼날같은 그미소 견딜수없었어
피가 솟구쳐서 그녀를 밀쳤고
그녀는 그렇게 쓰러졌어.
그건 사고였어요!



p.567-568

"줄리언 대령이 진실을 눈치챈 것 같소?"

나는 내 안경 너머로 맥심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분명 알았을 거요. 분명히." 맥심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 해도 절대로 아무 말 안 할 거예요. 절대로."

"그야 그렇겠지." 그는 지배인에게 다시 술을 시켰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구석 자리에서 말없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레베카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거요. 마지막 허세지. 내가 자기를 죽이게 만들고 싶었던 거요.

모든 것을 다 내다보았겠지. 그리고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웃어댔던 것이고. 죽으면서도 그렇게

웃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p.569

"헌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소." 맥심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천천히 말했다.

"댄버스 부인이 사라졌다는군. 자취를 감췄다고 하오.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하루 종일 방을 정리하고 짐을 쌌다는군.

4시쯤 역에서 사람이 와서 짐을 가져갔고.  (중략) 6시에 10분경에 댄버스 부인을 찾는 장거리 전화가 왔기에 부인 방으로 연결했다고. 하지만 삼십 분쯤 지나 방으로 가보았더니 텅 비어 있었다고 말이오.

아무리 찾아도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떠난 것 같다고 말을 하오. 아마 숲길로 나간 모양이오.

대문에서 문지기는 보지 못했다고 하니."

(중략)

"뭔가 예감이 좋지 않소. 좋지 않아요." 맥심이 말했다.

"부인은 아무 짓도 하지 못해요. 잘된 일이에요. 장거리 전화는 분명 파벨이 걸었겠지요 (중략)


p. 577

 "맥심, 맥심, 저게 뭐죠?"

그가 속도를 냈다. 차는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올라간 상태였다.

라니언은 이제 발밑에 있었다. 왼쪽에는 가느다란 은빛 강줄기가 흘렀다.

9킬로미터 떨어진 케리스로 가면서 점점 더 넓여질 강줄기였다.

이제 맨덜리로 가는 길이 펼쳐졌다. 달이 없었다.

머리 위쪽 하늘은 완전히 깜깜했다.

하지만 지평선은 깜깜하지 않았다.

불꽃처럼 선명한 붉은 빛이었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과 함께 불탄 재가 날아왔다.


댄버스 부인의 최후도 원작소설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종적을 감추는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와 뮤지컬에서는 스스로 지른 불길에 갇혀 최후를 맞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원작 소설에서 나와 맥심은 맨덜리의 악몽을 떨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떠돌며 살아가지만,

영화와 뮤지컬에서는 두 사람이 맨덜리 저택과 레베카의 망령에서 벗어나

희망찬 미래를 맞을 수 있을 거라는 암시를 준다.



처음에는 원작 소설처럼 심약했지만

'막심'의 사랑을 확인한 후

레베카의 그늘에서 벗어나,

강인하게 변해가는 영화와 뮤지컬 속의 '나'의 모습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원작 소설을 제일 재미있게 느껴졌다.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에 대해

말하는 장면인데,

원하는 대로 행동했고

원하는 대로 살았다고 말하는 부분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여자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p.370

"그분과 맞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아무도 없었어요.

그분은 원하는 대로 행동했고 원하는 대로 사셨지요.

작은 사자처럼 기운도 셌어요. 열여섯 살 떄는 남자도 다루기 어려운

크고 사나운 말들을 길들이기도 했지요. 지금도 눈에 선해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뛰는 말 등에 착 달라붙어 채찍을 휘두르고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던 모습이오.

그분이 내렸을 때 말은 온 몸이 피와 거품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고 있었죠.

그분은 '저놈이 이제 정신을 좀 차렸겠지, 대니 아주머니?'라고 말한 뒤 손을 씻으러

가버렸어요. 바로 그게 그분이 사는 방식이었죠.


p.372

어떤 남자든 그분을 한번 보면 미친 듯이 빠져들고 말았어요.

이집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그분이 런던에서 만났던 이들도, 해변에 데려가 주말을 보냈던 이들도. 모두들 사랑에 눈이 멀었지요. 그분은 깔깔 웃으면서 남자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제게 다 말해주었지요. 그분께 그건 일종의 게임이었거든요. 게임 말이에요.

그러니 누군들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모두들 질투에 몸부림치며 그분에게 목을 맸지요.

드 윈터 씨도, 잭도, 크롤리 씨도, 그분을 아는 모두가, 맨덜리에 왔던 모두가 말입니다."


원작 소설의 묘미는

맨덜리 저택에 대한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레베카>는 <제인에어>로 대표되는 고딕소설의 외피를 취하고 있는데,

신비롭지만 어딘지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맨덜리 저택의 모습을

원작 소설에서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에서도 스릴러의 대가인 히치콕이 연출한 만큼

맨덜리 저택이라는 공간의 서스펜스가 잘 나타나있지만

뮤지컬은 댄버스 부인이 창문을 열고

레베카가 돌아오길 바라며

열창하는 부분 이외에는

상대적으로 맨덜리 저택이라는 공간이 돋보이진 않았던 것 같다.


p. 5-10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 입구의 철문 앞에 섰지만

굳게 닫힌 탓에 들어갈 수 없었다. 철문에는 쇠사슬이 걸리고 자물쇠가 채워 있었다.

문지기를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녹슨 철문 틈새로 들여다보니 문지기 집은

오랫동안 버러졌던 듯한 모습이었다.

 굴뚝에서 연기도 나오지 않았고

작은 격자 창문은 깨어져 쓸쓸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순간, 꿈속에서 흔히 그렇듯 신비로운 힘을 발휘해 철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길은 본래 그랬듯 구불거리며 내 앞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면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점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그 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낮게 뻗어 내린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숙였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자연이 서서히 자기 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 길고 집요한 손가락이 슬금슬금 길 안까지

파고들어와 있었다. 과거에도 위협적이었던 숲이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검은 숲은 거침없이 길을 침범했다. 너도밤나무의 헐벗은 흰 가지들이 내 머리 위에서

뒤엉켜 기묘한 무늬를 그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교회의 아치 지붕 같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무들도 있었다. 너도밤나무와 닳을 듯 가까운 곳에서 앉은뱅이 떡갈나무와 비틀린 느릅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솟아올랐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덤블과 풀도 무성했다.

길은 이제 실오라기처럼 가늘어졌다. 자갈이 깔리고 군데군데 잔디와 이끼가 자라났던 본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낮게 드리워져 길을 방해했다. 옹이투성이인 뿌리는 해골의 발톱처럼 보였다.

(중략)

 한때 우리가 오가던 길이었던 그 실오라기는 이리저리 구부러지며 계속 이어졌다.

잃어버렸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쓰러진 나무 아래서 혹은 겨울비가 만든 진흙탕 건너에서

실오라기는 다시 나타났다. 길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나무가 무성해지면서 길도 몇 배로

늘어난 모양이었다. 길만 미로처럼 이어질 뿐

내가 찾아거려는 그 저택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그러다가 갑자기 불쑥 저택이 보였다. 사방으로 뻗어난 관목 때문에 시야가 막혀 있었던 것이다.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두 방망이질을 쳤고 두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맨덜리, 우리의 맨덜리였다. 늘 그렇듯 여전히 고요하고 비밀스러운 모습이었다.

회색 돌벽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창살로 나누어진 창에 푸른 풀밭과 테라스가 반사되었다.

세월도 그 돌벽의 완벽한 대칭을 깨뜨리지는

못한 셈이었다.

(중략)

집은 무덤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고통은 모두 폐허 아래 묻혀버렸다.

부활은 없을 것이다.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맨덜리를 생각할 때면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라고는 없이 살았던 곳, 그런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키가 크고 늘씬하게 말랐으며,

갈색 머리칼을 지닌 여자.

칼날 같은 미소를 지닌,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자.

그 어떤 상대와도 대화를 나눠도

상대의 취향과 관심사를 파악하여

단번에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여자.

사랑은 단지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여자.

비스듬히 기울어진 필체로 편지를 쓰는 여자.

완벽한 아내를 연기했듯 완벽한 엄마 연기도 자신있었던 여자.

하지만 단 하나 두려워했던 것은

늙고 병들어 죽는 것.


p.522-523

"그분께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무서워하시지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 걱정하셨던 게 있긴 했지요.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 번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니 아주머니, 죽을 때는 빨리

가고 싶어. 촛불이 꺼지듯 순간적으로'라고요. 그래서 사고가 난 후 저는 그나마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는 건 고통이 없다고 하니까요. 그게 맞는 말인가요?"

댄버스 부인이 줄리언 대령에게 묻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영화와 뮤지컬에서는 댄버스 부인과 함께 맨덜리 저택을 지배하고 있던

레베카의 흔적도 사라졌지만,

소설 속 나는 여전히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도

레베카의 그림자에 사로잡혀있다.


p.575

다시 잠으로 빠져든다. 이번에는 거실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

초청장을 발송하는 것이다. 두꺼운 검은 펜으로 쓴다. 하지만 써놓은 초청장을 보니 작고

네모진 내 글씨가 아니다. 길쭉길쭉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필체다.

나는 그것들을 치워버린다.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간다. 창문에 비친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다.

피부가 희고 아주 예쁜 얼굴, 검은 머리털이 탐스러운 얼굴이다. 그 눈이 웃는다. 입술이 벌어진다.

창문에 비친 그 얼굴이 나를 노려보며 웃어댄다. 다음 순간 그 여자는 자기 침실의 화장대에 앉아 있고 맥심이 머리를 빗겨준다. 빗질을 하면서 머리를 두껍게 땋는다. 뱀처럼 보인다.

그는 그렇게 땋은 머리 두 갈래를 양손에 쥐고 웃으면서 자기 목에 감는다.

"안 돼요! 안 돼! 우리는 스위스로 가야 해요. 줄리언 대령이 우리는 스위스로 가야 한다고 했어요!"


나 역시

영화와 뮤지컬을 다 보고나서도

원작소설의 화자처럼

레베카의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지 않았지만

수없이 묘사된 레베카의 모습들.

나이는 아마 서른 여섯쯤 되었을까.



P.57

"전 제가 서른 여섯살 먹은 어른이었으면, 그래서 검은 공단 드레스를 입고 진주목걸이를 걸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여전히 그의 웃음을 의식하며 다소 공격적으로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함께 차에 타고 있지 못했을 거요.

손톱 좀 그만 물어뜯어요. 지금도 이미 형편없는 꼴이니."

"건방지고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궁금하네요.

어째서 매일같이 저를 드라이브시켜주시는 건가요?

당신은 물론 친절한 분이시죠. 자선의 상대로 제가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는 나름의 자존심을 다해 좌석에서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그건 당신이 검은 공단 드레스에 진주목걸이 차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또 서른여섯 살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속으로 웃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맥심이 청혼하기 전, 두 사람이 함께 드라이브를 하는 소설 속 장면인데

어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다고 말하자

막심이 그랬으면 여기 함께 있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이 대화에서 레베카가 아마 서른여섯쯤 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보았다.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계속 궁금증을 갖게 하는 여자, 레베카. 화자인 나의 이름은 소설이나 영화, 뮤지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처음에 당신 이름이 아주 독특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했지요."

라고 소설 초반에 막심이 말한 것 이외에는.

소설에서야 화자니까 그렇다쳐도

영화나 뮤지컬에서도 '나'는

드 윈터 부인으로 불릴 뿐이다.

그에 비하면 레베카는, 등장인물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

작품의 제목조차 레베카가 아닌가.

이쯤되면 레베카 시점의 속편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소설과 영화, 뮤지컬을 보면 볼수록

더욱 궁금해지는 여자, 레베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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