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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May 01. 2021

[SF를 찾아서]13편/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천선란,박해울,박문영,오정연,이루카 지음 / 허블/ 2021년

그때그때 생각나면 찾아오는 비정기적 SF 장르 리뷰 No.13

※ 주의 : 이 리뷰에는 소설집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 3월, 다섯 명의 SF 여성 작가들이 모여 소설집을 펴냈다.

소설집의 제목은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이 다섯 명의 작가들이 '다른 행성'을 꿈꾸며 담은 이야기들이

무엇일지 궁금하여 책장을 펼쳤다.


첫번째 작품인 천선란의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는

외계 생명체와의 전투로 내면이 피폐해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꿈꾸는 주인공의 모습에 많이 공감했다. 


p.28~29

 비행체를 포획하고 공격하는 것이 전쟁의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핵심이었지만 작전이 바뀌었어요.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만이 답이에요. 많은 동지를 잃더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모두가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가족에게로, 연인에게로, 이전 시대로. 우리가 영위했던 평범한 일상으로요. 저도 그런 일상을 상상하긴 했어요. 전쟁이 끝나면 벤을 따라 미국에 가려고 했죠. 벤ㅇ 먼저 제안했어요. 제가 거기서 뭘 해먹고 사냐고 했더니 벤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그러더군요. 벤의 말이 옳았어요. 그날 빛을 잃고 별을 얻은 지구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제가 맞이할 평범한 일상을 세세하게 그렸더라면 더 큰 절망과 슬픔이 몰려왔겠죠.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전우 벤을 찾기 위해 이인은 그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장소로 향하고, 

그곳에서 그는 외계생명체인 '나나'를 만나 묻는다.


p.65

 “너희 종족은 이 행성에 왜 왔어?”

되찾으려고, 이 행성을.

 인간이 이 행성에 첫발을 내딛기 훨씬 이 전에, 몇 번의 멸망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에 그들이 있었다. 


나나는 말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이인에게 깨닫게 해준다.


p.66~67

이인은 나나와 함께 걸었다. (생략) 아주 오래전 이 행성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매개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의 꿈으로, 서로의 생각으로, 서로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모든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매개는 이곳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말을 소리 퍼져나가듯 그들의 대화는 안개처럼 뿌옇게 퍼져나간다. 

그 안개는 전부 그것들의 말이었구나. 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멈췄다.


천선란,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中에서


전 세계를 뒤덮은 전염병이 종식되었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평범한 일상이 아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이었다. 그 아비규환 같은 전쟁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주인공의 고독한 내면이 잘 묘사된 소설이었다.


두번째 작품인 박해울의 <요람행성>은 환경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p. 89

 나는 한음사에 이곳에 생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스크린을 통하여 메시지를 보냈다. 여기엔 지구처럼 풀도, 새도 물고기도 있고요. 다들 소리 지르며 죽어가요. 그러다가 신입 사원 연수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말이었다. 행성의 모든 일은 ‘알아서’ 판단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지구랑은 다르다고. 스스로 관리자 의식을 가지고 단호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가만히 있어봤자 정화 차량은 끊임없이 일하고 론은 자란다. 론이 대륙을 뒤덮을 때 비로소 이 행성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변모한다. 이곳은 지구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나는 한낱 1인분의 인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럴 거면,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박해울, 요람 행성」 中에서



인간이 요람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선택한 '론'

하지만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론'은 모든 것을 갉아먹는 존재가 되어가고, 

요람행성의 정화작업을 위해 투입되어 이 광경을 목격한 주인공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구화를 과연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인가?



세번째 작품인 박문영의 <무주지>는 다자관계와 공동양육을 중심으로 이뤄진 

새로운 관계와 가치관을 제시하면서, 

이것들이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본능을 넘어서는 가치가, 

그저 허울에 불과한 '말'뿐인 관계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잃지 않아야 하는가?



p.118

 “무주지는 말 그대로 주인 없는 평등한 땅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발 들이지 않을 새로운 아이들을 길러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아이들을 온전히 보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을 소유욕, 정확히는 독점 관계로 봅니다. 애착과 공감을 정확히 일컫는 말은 선별적 애착, 선별적 공감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밀어내고 맙니다. ‘내’ 아이, ‘내’ 연인, ‘내’ 가족, ‘내’ 국가, ‘내’ 신. 이 한정적인 상호 작용은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변화를 막습니다.”


p.122

 "일부일처제는 인류가 발명한 여러 제도 중에서도 유독 엉성하며 형편없는 임시적 관계망입니다. 소유욕에서 불거진 수많은 불운, 셀 수도 없는 치정 사건. 우리가 거쳐온 폭력의 상당 부분은 이렇게 만들어진 공포를 근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친자 확인 절차를 떠올려보세요. 그 과정은 왜 끔찍할까요. 반드시 내 아이여야 한다, 대를 잇는 아이는 내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왜 그래야 하죠?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왜 하필 당신의 유전자가 세상에 남아야 할까요? 그 특질이 독보적으로 고유하며 훌륭합니까? 인간 자체가 특별히 존엄한 종인가요? 배우자는 무슨 이유로 당신 이외의 다른 대상과 평생 관계를 맺을 수 없나요?”

무주지 안의 모든 인간관계는 다층적이었다. 


p.143~144

 무주지는 본능을 넘어서는 가치를 강조했다. 그렇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분쟁 말미에 남는 건 말뿐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말마저도 사라졌다. 


 박문영,「무주지 中 에서


네번째 작품인 오정연의  <남십자자리>는 인생의 제2막을 꿈꾸며 이주한 양로행성에서의 도서관 사서로 살아가는 '해리'와 해리의 손녀인 미아가 함께 한 여행 이야기다. 


p. 150

  "오늘 업무가 뭐더라“

 새벽빛에 연약한 눈이 적응하길 기다렸다가 해리는 일정표를 확인했다. 도서관에 새 자료가 도착하는 날이었다. 준비해놓은 카달로깅 자료를 매체에 태깅하고 그 기록이 시스템에 무사히 안착했는지 검수해야 한다. 수요일은 이용객이 많은 날이기도 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생략)

  이곳은 남십자자리의 가장 밝은 별인 아크룩스로부터 1.78광년 떨어진 CR8983베타 항성계의 제5행성. 남십자자리가 북위27보다 북쪽의 지구에선 지평선 밑에 가라앉아 있는 덕분에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위치를 눈으로 더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외계행성이지만, 지구에선 꽤 유명했다. 양로행성이란 이름으로. 

 스스로가 직업을 선택하고 이에 따른 역할극에 빠져든 주민들이 천천히 하루치 일상을 개시했다. 

P.184

  아니, 선배도 몰라. 그 심정. 이제 미아는 그렇게 대꾸할 수 있다. 양로행성의 인간을 좀먹는 첫 번째 불안감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해리가 미아의 섭섭함을 뒤로한 채 양로행성으로 이주한 것은 그 불안을 아주 많이 미리 앞당긴 결과였지만 언젠가는 닥칠 미래였다.

  

오정연,「남십자자리」 에서


언젠가 닥칠 불안한 미래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일상으로 '지금 이 시간'을 채워가는

해리의 당당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p. 205

 두 달 전, 폐기위성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해리는 오랜 독거생활도 끝냈다. 옆집의 메이가 짐가방을 끌고 해리의 집 문턱을 넘었다. 메이에 따르면 해리는 느리지만 꾸준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해리가 잃었고, 잃고 있으며, 잃게 될 과거에 대해 메이는 알 도리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해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지금을 함께하기 위해 함께 살기로 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수록된 이루카의 <2번 출구에서 만나요>는  외계신호 분석가인 엄마를 통해 외계 신호 연구원을 꿈꿨지만, 엄마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알리가 주인공이다. 알리가 우주에서 쏟아지는 신비로운 외계신호들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엄마를 떠올리며 제각각의 형태에서 저마다의 패턴으로 쪼개지고 합쳐지며 각양각색의 빛으로 물들어가는 신비한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몽환적인 도입부가 인상적이었다.

알리는 '2번 출구'라는 공간에서  외계행성에서 보내는 메세지를 해석하고 외계의식과 결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인 유니를 만나  인류가 서로에게 보내는 혐오와 폭력의 메세지와 데이터를 정화하며, 엄마를 진정으로 이이해하게 된다. 


p.223

관측 데이터에 남아있는 유니의 접속 기록을 뒤져보던 나는 이것이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유니의 단독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조사단이 한국에 머물던 때부터 시작된 것일까. 조사단의 기록을 정리하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나에게는 평생 이름이 아닌 엄마라 불리던 사람. 패드에 흐르는 그 이름을 따라 읽으며 마주한 것은 반가움과 그리움이 아닌 낯선 의문이었다. 기록물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자 의문은 더 강하게 나를 집어삼켰다. 유니는 왜 엄마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을까.

p.226

사람들이 만나는 나는 매번 다른 모습이야. 음성, 혹은 텍스트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형태를 원한다면 그들이 보고 싶은 모습을 보여줘. 지금 당신이 보는 나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대부분은 당황하거나 왜 이런 모습을 내가 원하는 것일까 이유를찾기 위해 정신이 팔리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납득하거나 혹은 어떤 형태든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이들도 있어. 이들은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해. 지금 여기, 2번 출구처럼. 이곳은 영혼, 의식, 정신의 집합체야. 우리에게는 시공간을 벗어나 존재와 존재로서 서로를 알려주는 이런 관계들이 소중해.

p.235

 엄마의 흰 머리칼과 유독 웃음이 많았던 얼굴에 알맞게 자리 잡은 주름을 기억하고 있어. 마지막 엄마의 말을 듣지 못한 것과 네가 외계물질 연구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들려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프지만, 누구보다 밝게 빛나던 눈동자와 엄마의 주름에 정확히 들어맞았던 웃음을 떠올려. 엄마가 눈감을 때 지었던, 평온한 얼굴에 머물던 미소. 너는 생각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나는 알아. 너의 주파수가 완성되었고, 이제 2번 출구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이루카,「2번 출구에서 만나요」中에서


소설집의 제목은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이지만, 

이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이 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전쟁, 폭력과 혐오, 환경오염, 다자관계, 초고령사회 등 

지금 여기, 현재 지구의 문제들이 

외계행성, 외계신호, 외계생물체, 테라포밍, 인공지능 같은 SF 소재를 만나, 

흥미로운 이야기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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