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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Aug 11. 2023

영원의 밤 (강 스포주의)

엘릭시르 / 2020년 출간 / 결말 및 반전 정보 있음

서랍 속에서 다시 꺼내 읽는 장르소설 이야기 No.7


무더운 여름밤, 오랜만에 미스터리 소설을 꺼내 읽는다. ‘지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중학교 때 발레를 전공하셨다던 무용 선생님은 최애 작품으로 ‘지젤’을 꼽으면서 

줄거리를 설명해주신 적이 있다. 발레를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젤을 꿈의 배역으로 꼽는다고 했다.

  몸치인 내게 무용 시간은 정말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젤의 줄거리만큼은 흥미로웠다. 

누군가 선생님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말했다.

  “그러니까 서양 처녀 귀신들 이야기네요.”

듣고 보니, 과연 그러했다. 하지만 지젤의 줄거리를 들을 당시에도, 

국립발레단의 지젤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도

 내 머릿속에 일명 서양 처녀 귀신인 ‘윌리들의 여왕’ 미르타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미르타, 유라연에 주목했다.


  예술고등학교 발레 교사인 은지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동생의 사고 소식에 서둘러 귀국한 은지의 오빠이자 기자인 은호는 올해 초, 비슷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학생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취재한다는 명목으로 학교에 잠입한다. 은호는 학생들을 인터뷰하면서 진실에 한발씩 다가가게 된다.          


p.25

"사실은 월등하게 더 뛰어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꼭 다른 역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지젤을 두고요? 발레리나들의 꿈의 역할, 아닌가요?”

"네, 맞아요. 그래서 모두가 의아해했죠. 설득해보려고도 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뭐, 따지고 보면 그 역도 나쁜 역은 아니죠. 주역은 아니지만 찬사를 받을 만큼 제대로 해내기 쉬운 역할은 결코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 친구는 무슨 역을 하기로 했나요?”

“윌리들의 여왕이요.”

윌리들에게 여왕이 있었나. 원한에 가득 찬 처녀 귀신이 질서 있게 단체 생활을 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은호가 의아하게 생각할 때쯤 교감이 큰 미닫이 문 앞에 섰다.      


p. 37

윌리들의 여왕은 분명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어. 은호는 그런 생각으로 눈을 빛내며 라연을 보았다. 라연은 은호와 눈이 마주쳤지만 잠시 쳐다보고는 이내 무시하려는 듯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너는 나름대로의 플랜을 짰겠지만 그게 네 숨통을 조이게 될 거야. 은호는 은밀하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p.85

이쯤 되니 대체 라연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꼭 C가 은호의 속을 읽은 것같이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하게, 남들이 아는 사실만 말씀드리자면 이래요. 엄마는 정부 요직에 있었던 유명 정치인의 딸이자 사업가이고, 이모는 국립, 유니버설이랑 함께 3대 발레단 중 하나인 유설 발레단 단장이고. 아빠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회사 사장이었대요. 알려진 것만 해도 이렇다는 거예요.”

이제야 교감이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던 것이 조금 이해가 됐다.     


p.102 

"그럼... 너는 라연이나 그런 친구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

“유라연이요? 오히려 어설픈 부자들이나 졸부들이 못되게 굴죠. 제가 세상의 모든 부자 애들을 알 수는 없지만, 제 경험상으로는 그래요. 아까 걔도 엄청 부잔데 저랑 잘 놀잖아요.”

“유라연은 졸부가 아니라서 그렇지는 않다?”

“네, 잘살고 못살고 그런 걸로 사람 무시하는 건 못 봤어요. 능력이 너무 없거나 주변에 피해 줄 때는 좀 많이 쪽 주는 것 같긴 하지만. 애초에 그걸로 차별하면 윌리에 절 넣어줬겠어요?”     


P.456

“이런 건 라연이가 다 알려준 거야?”

Z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미르타도 처음엔 지젤같이 맑고 순수한 소녀였을 거예요.“

Z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믿음이 심장과 함께 산산조각 난 이후에는, 순수했던 자신을 버린 거예요.”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는 않지.”

“맞아요.”

Z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그런데 아저씨,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그렇게 한마디 문장으로 맞다 틀리다 말하기 전에요. 윌리들의 밤에 대해서요.”     


P.457

왜 지율이는 죽어야 했지?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답도 없는 물음들이 반복될수록 평온한 밤을 보내긴 힘들어질 거예요. 윌리들은 이미 죽었지만 고통 때문에 안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미친 춤을 춰야 그 밤을 보낼 수 있는 거예요. 좋든 싫든 이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거예요. 그런 밤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어요?”     

  은호는 학교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이 윌리들과 그녀들의 여왕인 미르타의 복수극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지젤인 지율을 위해 기꺼이 어둠의 복수극을 펼쳤던 것이다. 그녀들은 지젤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을 용서한 원래의 줄거리에 반기를 들었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쉽게 용서를 받지만, 윌리들은 고통 때문에 안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영원토록 미친 춤을 추어야 한다. 이 소설은 그런 윌리들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그녀들에게 바치는 진혼곡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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