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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Oct 17. 2023

어파이어 (스포 있음)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 2023년 9월 개봉 / 독일

예술의 성취와 삶의 욕망을 향한 작가들의 삽질 시리즈 No1. 




딱히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지라 

솔직히 감독이 유명한 사람인지도 몰랐는데, 

평일 저녁의 극장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최근, 상업영화 타이틀을 달고 개봉한 영화를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나 포함해 겨우 4-5명 남짓한 관객들과 

본 적이 많아서인지 

양 옆에 사람이 꽉 차 있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예술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극장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뭔가 나보다는 다른 관객들이

보다 이 영화를 친숙하게 받아들일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독일 영화를 본 것은 아주 오래전, 

동독을 배경으로 펼쳐진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를 본 것이 전부인 것 같은데

그 영화는 아주 인상깊게 보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자세한 줄거리조차 이젠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래서 독일에 바다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 건지

발트 해 별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라는데

그 배경지는 어디인지,

영화를 보다가 조는 건 아닌지, 

이런 따위의 생각을 하며 화면을 응시하다가,

이내 영화 주인공인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의 찌질함에 금세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입을 열 때마다, 오, 맙소사.가 저절로 나오는 주인공.

희대의 명대사 

"일이 나를 허락하지 않아요."

소설 마감을 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친구의 부탁과 타인의 초대 등을 거절하고

기껏 하는 일이 "척"이다.

친구인 펠릭스가 안보는 사이 딴 짓을 하다가

친구가 돌아오는 기척이 보이자, 

후다다닥 노트북 앞에 달려가 앉는 씬은 압권. 

근데 그 장면을 보고 내심 킥킥거리다가

한편, 마음 한구석이 찔려온다.

음, 저거 보고서 쓸 때 난데?

물론 "일이, 허락하지 않아요."

라는 따위의 대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소설을 완성하는 "척" 하기 위한

레온의 삽질이 때로는 눈물 겨울 정도이다.


자신의 소설을 지적하는 나디아를 아이스크림 판매원 따위라고 무시하다가

그녀가 문학을 전공한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레온의 열등감도, 마냥 찌질하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내 안도 저런 모습이 있기 때문이겠지.

레온은 자신의 소설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저 레온에게는 세상 모두가 다 방해꾼일 뿐이다.

영화관에 모기가 있다고 착각할 만큼

신경을 긁는듯한 모기소리가 

극장의 사운드를 채우는 것은 그때문일까?

출판사 사장이 암병동에 입원한 것조차 모르고

그를 입원시킨 나디아에게

둘이 무슨 이야길 했냐고,

추궁하는 레온의 모습을 보고

처음엔 실소가 나왔지만,

그 순간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예술가는 물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침잠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게 과연 전부일까?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소통을 그저 무시해도만 되는 것일까?


예술과 관련된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과의 소통이 많이 필요한 회사를 다녔을 때

직장 상사가 나에게 "너는 다른 사람한테 아예 관심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매주, 아니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직업이었는데도.

그때 나는 "곧 이곳을 뜨고, 다른 이야기를 들을 거야."라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사의 지적처럼, 그때의 나는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 같은 

허구의 인물들에만 관심이 있을 뿐

내가 직접 관계를 맺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 현실의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다.



자기가 완성해야 하는 소설밖에는 관심이 없어서,

암 병동을 보고도

나디아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도 못했던 레온처럼.


레온이 보지 못했던 것은,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디야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레온은 자신안의 모순을 깨닫는다.

레온이 친구인 펠릭스와 데비트가 연인 관계로 발전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지도 못했던 것 역시

자신 외의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무언가를 조금 느꼈다 해도

귀찮아서 그냥 무시해버렸거나.

지금은 타인과의 소통이 잦은 회사는 아니라서,

그로 인한 업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나도, 그때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을까?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한 사람의 시야를, 세계를 바꾸어 놓는다.

레온에게는 나디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레온은, 나디아를 통해

그제야 사랑의 본질에 조금씩 다가선다.

산불 속에서 꼭 껴안고 죽음을 맞이한

두 연인, 펠릭스와 데비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도할 수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한 사람의 세계를 뒤바꾸는 만남이,

비단 남녀 간의 만남에 국한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레온은 나디아를 만나 변화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한편의 멜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1인칭 주인공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레온의 심리 묘사와 감정선이

세밀하게 느껴졌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산불의 경고.

하지만 그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리라 치부해버리는 레온.

그러나 레온은 사실, 조금씩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결코 자신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정확히 산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감독이 무엇을 은유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산불이 "감정"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려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ps.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고,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나디야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아스라'를 읊는 장면이다.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영화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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