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육체도 잠식한다.
익숙한 배경음이 깔린다. 20세기 폭스사의 로고가 화면에 떠오른다. 두 영화의 첫 번째 공통점이다. 곡성을 보러 간 한 네티즌은 이 순간 상영관을 잘못 들어온 건 아닌지 어리둥절했다는 관람평을 남겼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다.
이것 말고 두 영화의 두 번째 공통점은? ‘불안’이다.
불안이 불러일으키는 혹은 불안을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감정들. 의심과 두려움, 공포와 광기는 상영시간 내내 두 영화를 관통한다.
참혹한 죽음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었다. 범인은?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 냉혈 살인마?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 철저하고 지능적인 살인마? 아니다. 증거와 흔적은 온 사방에 널렸다. 하물며 범인은 현장에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범인의 정신이 온전해 보이지 않다는 정도.
다음은? 왜 죽였는가 하는 점이다. 알 수가 없다. 범인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에 비슷한 죽음이 연이어 발생한다. 현장의 모습도 범인의 정신 나간 모양도 같다. 이제는 이유가 궁금하다. 누가 죽였는가? 보다 왜 죽였는가? 가 미치도록 궁금해진다. 그보다 이 모든 죽음을 사주한 존재가 있을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닌 범인, 광기로 뒤덮인 살인 현장. 영화 속 등장인물도 관객도 일찌감치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에 대해 확신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혹은 뭔가 있다. 그것은 ‘신’일 수도 있고 ‘귀신’일 수도 있으며 ‘마귀’ 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아닌 것이다. 이미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다.
이제 누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귀신’인가? ‘마귀’인가? 이 사악한 존재로부터 나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하지만 불안은 너무 깊게 스며들었다. 누구를 믿어야 하며 누구를 의심해야 할까?
불안에 잠식당한 사람들의 곳곳에 폭력과 광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다 함께 미치는 것이다. 칼을 들고 미치든 칼을 맞고 미치든. 선이든 악이든. 그렇게 불안에 모든 걸 맡기고 나면 구분이 모호해진다. 오히려 흥이 난다.
마침내 피로 흥건한 현장엔 불안에 잠식당한 육체와 영혼만 남을 뿐이다.
나는 제목부터 불안했다.
엑스맨 시리즈의 정통 관객이 아닌 나는 기본 이하의 정보만을 가지고 있었다.
1. 엑스맨 시리즈를 보긴 했지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2. 시리즈의 순서가 헷갈린다.
3. 연대기별로 정리할 수 없다.
4. 등장하는 주요 엑스맨 캐릭터 중, 아는 이름이 별로 없다.
이런 내가 보기에 엑스맨은 ‘권선징악’의 구도가 선명한 히어로 장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포칼립스’라니.
[아포칼립스의 뜻: 초기 유대교 및 크리스트교에서 신이 선택된 예언자에게 주었다는 비밀의 폭로 또는 그것을 기록한 것. 선과 악의 대립, 현대가 악이 지배하는 시대라는 인식, 사망자의 부활.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 이 정도다.
세상에 엑스맨의 펜들은 ‘아포칼립스’가 캐릭터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아포칼립스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리고 불안해했다. 엑스맨들이 종말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
완전히 빗나가진 않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곧 나의 착각을 알아챘다.
엑스맨에서 ‘불안’의 정체는 확실히 ‘곡성’보다 명확하다. 그래서 그 ‘불안’은 스크린 안에서만 위력을 발휘했다. 스크린 밖의 관객은?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관객은 주인공들이 그 ‘불안’을 극복하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영화 내용으로 돌아가면
고대 이집트 ‘아포칼립스’는 가까스로 소멸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다.
현대, 악을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 눈을 뜬 ‘아포칼립스’가 힘을 되찾고 돌연변이들을 찾아내 지상을 지배할 계획을 세운다. 자비에 박사를 비롯한 엑스맨의 주요 캐릭터(미스틱, 진 그레이, 나이트 크롤러, 비스트, 퀵실버 등등)가 아포칼립스와 그의 부하(?) 격인 (사일록, 스톰, 아크 에인절, 매그니토)에 대항한다.
TIP: 이제 막 깨어난 울버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매그니토’다. 엑스맨의 충실한 독자가 아니라도 그가 이후 악당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
‘불안’이 그의 정신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에릭(매그니토). 부모님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모습을 본 그는 자비에(이 캐릭터야 말로 대단히 밋밋하다.)의 설득으로 인간과 함께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인간에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폭주한다.
여기서 그 과정을 천천히 살펴보자.
에릭은 직장에서 위험에 처한 동료를 구해준다. 이때 그의 능력을 본 직장 동료들은 그를 신고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엑스맨)를 두려워한다. 능력을 가진 이들이 언제 어떻게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처음 발견한 이들 역시 불안해한다. 자신의 능력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불안을 평온으로 바꿔 주려는 이가 자비에 박사이다.)
결국 에릭은 아내와 딸 앞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혀가야 했다. 이때 에릭의 능력을 물려받은 딸은 (역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할뿐더러 조절도 하지 못하는) 아빠와 헤어져야 한다는 불안과 공포 때문에 폭주한다. 이때 에릭을 끌고 가려고 온 사람들은 에릭의 어린 딸이 일으키는 낯선 장면에 불안에 빠져든다. 다음은 ‘비극’이 제 차례를 기다리다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절망하는 에릭 이외에는 다 죽어 자빠진다.
나는 에릭(매그 니토)이 울부짖는 장면에서 불안했다.
에릭을 신고한 사람들의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불안은 결국 불안에 빠진 사람들을 자빠뜨렸다.
강력한 돌연변이 아포칼립스의 등장에도 불안에 맞서는 자비에 박사는 말했다. 동료가 있어 자신들은 불안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능력을 가진 엑스맨이기 때문이 아닐까? 엑스맨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글쎄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 매그니토는 폭주를 잠시 멈추고 자신의 ‘불안’에서 벗어났다.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는 관객들은 그가 곧 자신의 ‘불안’에 영혼이 잠식당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매그니토의 뒷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엑스맨들은 '불안'때문에 육체까지 무너지는 데는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다행인건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