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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술사 Jul 29. 2016

[달.쓰.반] 27편/ 연극 코펜하겐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보성의 원리, 슈뢰딩거의 고양이/물리학으로 보는 삶 

가끔은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쓴, 장르 불문, 반전 있는 금요일의 리뷰 No.27

"코펜하겐"하면, 제일 먼저 인어공주 동상이 떠오른다.

어릴 적 내 꿈은 안데르센의 나라 덴마크에 가서 

코펜하겐의 백년 이상 된 인어공주 동상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데르센 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출신이라는 것은 

연극 <코펜하겐>을 관람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닐스 보어.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에 대한 논문으로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의 대부였다. 


오는 7월31일까지 동숭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코펜하겐>. 

하이젠베르크가 하는 극중 대사를 살짝 변형해 인용하자면, 

그의 위상은 마치 물리학자들에게 세례를 내리는 교황 같았다고 한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연구소는 양자물리학의 메카로, 

이곳에서 코펜하겐 해석이 정립되기도 했다.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반박하여 대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보성의 원리와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극장 로비에 설명이 붙어 있다.


<연극 코펜하겐>에는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 

물리학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연극을 관람하면서 

회사 업무 때문에 대전에 있는 핵융합연구소에 갔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열심히 녹취하고, 노트에 받아적기는 했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미심쩍어서 

도서관에서 가서 쉽게 씌여진 물리학 책을 찾아보고 

원자핵공학과 교수님들의 논문을 밤새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물리학 이론을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무대 위에서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우라늄과 중성자, 핵분열 등의 단어를 나열하면서 대립할 때 

(예전에 분명히 한번 이상 들었던 설명이었지만)


현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조금 알아들은 것은


닐스 보어와 존 휠러가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일어나려면

우라늄 238과 235를 분리, 농축시켜야 하는데


(천연상태의 우라늄은 1퍼센트 미만의 우라늄 238과 99퍼센트 이상의 우라늄 235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상태에서 중성자가 흡수되면 우라늄의 핵분열이 멈춘다고 한다.)


우라늄 235을 분리, 농축 시키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비용(대규모의 생산라인)이 들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이 연구 결과에 대해 더 파고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라는 질문이 나온다.

하이젠베르크는 새파랗게 어린 시절, 

닐스 보어의 강연회에 찾아가서

그의 수학적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던 사람이다.


스승의 논문과 연구 발표에 대해 늘 논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 

왜 여기서 멈칫했을까? 


이것이 바로 연극 <코펜하겐>을 이끌어가는 주된 줄거리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라늄의 핵분열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1941년 코펜하겐을 방문했고, 

스승과 제자이자 최고의 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 갈라서게 된다.


연극은 하이젠베르크가 1941년, 보어의 집을 찾은 

그날을 3번 반복,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반복 될 때마다 구성상의 디테일은 조금씩 달라지며 

보어의 부인 마그리트는 하이젠베르크의 감춰진 속내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고뇌에 빠진 하이젠베르크를 보어의 죽은 아들 크리스티앙과 

대비시키는 연출도 다소 아쉬웠다.


보어가 물에 빠진 크리스티앙을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하이젠베르크에게 보어가 화를 내지 않고 우라늄의 핵분열에 대해 

조언해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두가지 가정을 대비해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은유한 것일테지만

연극의 구심점을 흐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관계에 집중했더라면

극의 밀도가 더욱 높아졌을 것 같아 아쉬웠다.

(내 생각에 아들의 이야기는 사족 같아보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시 극장 로비에 그 설명이 있다.


그러니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그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상태를 

일컫는 말인 듯한데, 내 식대로 이해하자면 (물론 이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다) 이렇다.


내(고양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상자의 뚜껑을 열기까지)는 

결혼 생활이 행복할지, 불행할지,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그것이 삶의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상보성의 원리는 빛이나 전자와 같은 소립자(미립자)는

파동으로 퍼져 있다가 관찰자가 관찰하면

입자로 나타나고, 그렇지 않을 때는 파동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두 가지 성질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빛이 동시에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나타낼 수는 없다고 한다.


이것을 삶의 방식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관점으로 치환해 보았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인이었고 

1941년 덴마크는 독일에 점령당했고, 

닐스 보어는 유대인이었다.


보어를 찾아온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인일까? 과학자일까? 

이것은 우리가 어떤 관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는 전쟁중인 조국에 원자폭탄을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독일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연구를 인류를 말살하는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과학자일 수도 있고, 

연구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자신의 몫이 아니기에, 

그저 연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연구원일 수도 있다.


분명히, 그는 독일인이면서 과학자이고, 연구원이지만, 

우리가 어떤 관점을 택하여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다른 성질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확정성 원리는 스승과 제자이면서, 유사 부자이면서, 라이벌이면서, 전쟁의 적인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했다. 


생전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연극의 시작점인 사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승과 제자, 유사 부자, 라이벌, 정적인 두 사람의 관계는 

관찰하려는 순간 그 즉시 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한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결국 삶은 보어의 대사처럼

역설과 모순의 세계이다.

 

이 역설과 모순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삶의 불확정성을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하이젠베르크는 정말 원자폭탄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을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계산을 회피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면의 갈등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일까?


해석은 여러가지 버전으로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좋은 예술작품은, 

다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 <코펜하겐>은 좋은 작품이었다.

또한, 연극 <다우트> 이후 아주 오랜만에 남명렬 배우의 작품을 보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무게감 있는 배우의 연기는 작품의 신뢰도를 높여준다.


ps. 빅뱅 이론을 탄생시킨 조지 가모프 역시 

보어의 코펜하겐 연구소를 거쳐갔다고 한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식을 줄줄이 읊어서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론물리학자들의 귀여운(가끔은 한심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미드 <빅뱅이론>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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