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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의 맛

오리육개장

by 작고따뜻한일상

제안서의 계절이다. 그것은 '매일매일이 마감일'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팀회의에서 제안의 주제와 작업 범위를 정하지만, 그 주제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풀어낼지는 오롯이 디자이너의 몫이다. 완성도 있는 키비주얼이 나오기 전까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제안용 키비주얼 시안이 나오고 사내 컨펌까지 끝나야 비로소 전시 업체와 무대, 영상 파트에 공유된다. 키비주얼이 늦어져 일정이 지연됐다는 말을 듣기 싫어 밤을 새워서라도 시간에 맞춰 시안 작업을 한다. 징한 성격 덕에 눈밑 다크 서클은 사라지지 않는다. 에이전시를 거쳐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재택근무를 한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마감은 늘 한결같이 새롭다.


핸드폰 업무 카카오톡은 항시 대기 중이고 책상 위 컴퓨터는 늘 켜져 있는 상태가 계속된다. 시간에 쫓겨 긴장한 상태로 온라인으로 소통하다 보면 느낌표 하나, 물음표 하나에도 민감해진다. 느낌표를 보면 재촉하는 건가? 싶고 물음표를 보면 뭐지 비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료를 요청하거나 시안을 보낼 때면 조심스러워진다. 상대도 나와 같을까 싶어 이모티콘도 기호도 없이 공손한 말투에 마침표 하나만 찍어 보낸다. 공유 드라이브의 폴더명과 파일명도 평소보다 더 꼼꼼히 챙긴다. 나는 파일명조차 오타를 내는 사람이니까.


별 걸 다 신경 쓰는 제안서 마감을 한차례 하고 나면 긴장했던 몸이 축 늘어진다. 반면 마음은 가벼워져 붕붕 뜨는 요상한 상태가 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BGM이 모두 아름답게 들리고 잠자던 식욕이 깨어난다. 마감을 잘 지켜냈다는 성취감에 조금은 우쭐해진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춰 줄 음식이 필요하다.


육개장 레서피

냉장고에 있는 채소들을 모두 꺼낸다. 무, 대파, 양파 꼭지, 표고버섯기둥, 마늘을 넣고 채수를 끓인다. 지난 추석에 먹고 남은 오리백숙은 결대로 찢어 둔다. 고기에 다진 마늘, 고춧가루, 국간장을 섞은 양념장을 넣어 밑간 한다. 명절에 만들어둔 고사리나물은 5cm 정도 길이로 썰고, 대파와 얼갈이배추도 고사리 길이에 맞춰 썬다. 머쉬마루 버섯은 손으로 가늘게 찢어 준비한다. 끓여낸 채수를 체에 걸러 냄비에 붓고, 밑간 한 오리고기와 손질한 채소들을 모두 넣은 뒤 바글바글 끓인다. 이웃에서 나눠준 부추를 잊고 있었다. 마지막에 부추를 넣고 후추로 마무리하면 오리육개장 완성이다!

(언제 보아도 채소들은 곱다)

흐르는 물에 배추를 씻고 버섯을 결대로 손질하며 손끝으로 재료의 촉감을 느낀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천천히 깨어난다. 고사리를 가지런히 도마에 놓고 자르고, 대파를 세로로 4등 분할 땐 숨을 훕- 들이쉰다. 붕 떴던 마음이 가만 내려앉는다.


진한 국물에 갓 지은 밥 한 그릇을 공들여 먹고 나면 워킹타임이 아닌 시간에 울리 던 카카오톡, 늦어지는 원고, 과업범위를 넘어선 일을 당연하듯 요구하는 협력업체, 결과물을 재촉하고 디자이너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의 태도에 화가 났던 쨍한 감정들이 흐려진다.


그들도 자기 자리에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느라 어쩔 수 없었겠지 싶어진다. 나라고 매번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던가. 느낌표와 물음표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곡해하는 난 얼마나 옹졸한가. 팀원이 공유 파일명을 규칙대로 기재하지 않았다고 구시렁거리던 내 모습을 떠올린다. 마감은 나 혼자만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쌓여 있던 서운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참 간사하다. 한 끼 식사로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다르게 보인다.


배 부르고 마음 놓이니 열린 창 너머로 공원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느껴진다. 구구 산비둘기 소리도 들린다. 이번 마감도 잘 지켜냈구나 안도의 큰 숨을 쉰다. 오늘은 일찍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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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일기

♪ Schubert: Arpeggione Sonata

pf. Emanuel Ax & vc. Yo-Yo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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