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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받고 싶어

잠깐 이어도 좋은 것

by 작고따뜻한일상

꽃 사줘 화병에 꽂아 두고두고 보게.


오랜만에 친구 둘이 놀러 오기로 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묻는 문자에 콕 집어 꽃을 사달라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와, 필요한 거 없어'라고 답했을 텐데. 원하는 것은 표현해야 한다는 걸 최근에서야 깨달은 나는 솔직하게 받고 싶은 선물을 말했다.


나였다면 달랑 꽃 한 다발 사 들고 왔을 텐데 친구들은 네 손으로도 들기 힘들 만큼 바리바리 선물을 들고 왔다. 이틀 전에 수확했다는 푸릇한 감귤, 홍시와 포도 한 박스, 오렌지 한 꾸러미, 두루마리 화장지, 아이들 간식거리… 그리고 꽃다발까지.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역시 내 친구! 퍼주기 좋아하는 손 큰 사람들!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친구들은 퍼주고 나는 받기만 하는 이 불공평한 관계가 아무렇지 않게 아무런 잇속 없이 이십여 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우린 열아홉 새 학기가 시작된 삼월의 춥고 휑한 대학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어색한 시간이 지나 대학생활과 서로에게 익숙해진 우리는 강의가 끝나면 제주시내 대학가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곤 했다. 성실히 출석하고 제때 리포트 제출하고 시험 잘 보면 장학금을 받는, 원인과 결과가 선명했던 그 시절 우리는 다가올 내일을 낙관했다. 갑갑했던 입시와 교복을 벗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떡볶이에 튀김 어묵 순대까지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학업을 이어가고,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으른들의 세계는 선명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울 때마다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들은 그때마다 무턱대고 힘찬 응원을 보내 주었다.


연차가 쌓이고 포트폴리오가 두꺼워졌지만 승질 더러운 디자이너로 수면 부족과 위병을 달고 살며 자주 허무함을 느꼈다. 그럴 때면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각자의 상념과 당면한 크고 작은 현실의 문제들, 그리고 타인에 대한 험담을 나누었다. 서로의 깜냥만큼 위로를 건네고 나면, 무거웠던 힘듦이 견딜 만한 무게로 바뀌어 있었다. 만나지 않아도 가끔 온라인으로 나누는 대화만으로 서로의 대나무밭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우린 함께 이십일세기 초반을 건너왔다.


초여름, 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실과 슬픔 앞에 어떡하나 망연했다. 친구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장례식장에 가서는 오래도록 앉아 천천히 밥 한 그릇만 먹고 나왔다. 용기가 있었다면 친구를 꼭 안아 주었을 텐데. 어색해서 못했다. 다정한 말 한마디도 못했다. 서둘러 조의금을 전하며 밥 잘 챙겨 먹고 잠 잘 자야 돼 정도의 말만 겨우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타인에게 서투르고 무심한 나를 친구는 이십 년이 넘도록 챙겨주고 있다. 그러고도 늘 '뭐 필요한 거 없어?' 하고 묻는다.


장례가 끝나고 여름이 한창일 때, 친구는 고마웠다며 집 앞까지 와서 초당옥수수 꾸러미를 주고 갔다. 옥수수가 잘 여물어 내 생각이 났다고 나눠먹자고 했다. 해준 게 없는데 뭐가 고맙다는 거냐 친구야. 옥수수를 먹을 때마다 고마움이 울컥 올라왔다. 그 와중에 옥수수는 옹골차고 달았다.

(푸릇푸릇 감귤, 잘 여문 홍시, 보라색 리시안셔스)

멀리까지 와서 차 한잔 마시고 서둘러 돌아가던 친구들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아무래도 난 계속 받기만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살아가는데 계산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인다. 철없이 이기적이어도 되는 연(緣)이 있어 안심된다.


눈에 잘 닿는 곳에 화병을 두고 꽃을 본다. 기분이 좋다. 곧 시들겠지만 지금은 어여쁘다. 올 가을도 이렇게 지나겠지. 늘 그렇듯 무심히 지내다가 문득 만나 서로의 내밀한 가정사를, 허물을 조금씩 내비치고 비난이나 책망 없이 그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일 테다. 이젠 열심히 해보자 하는 격려가 조심스럽다. 섣부르게 미래를 낙관하는 말 또한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구나' 한다. 그 한마디에 힘을 얻는다.


다음에 만날 때도 꽃을 사달래야지.

난 계속 받는 친구로 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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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일기

♪ Ellie Goulding : How Long Will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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