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지 않는 고마운 맛
한라산 1100 고지에 첫눈이 내릴 만큼 기온이 낮아 지자 막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독감이 돌기 시작했다. 학교에선 마스크 착용과 개인위생을 당부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며칠 뒤 월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막내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 열이 나서 선생님이 조퇴해야 한대.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야."
부랴부랴 반차를 내고 아이를 데리고 동네 의원으로 향했다. 독감 검사를 마치고 약을 처방받았다. 그 후 사흘 내내 막내는 고열과 두통, 기침으로 고생했다.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먹고 싶은 것을 자꾸 물었다. 막내는 따뜻한 된장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 '된장국이라면 엄마가 잘 끓일 자신 있지!' 나는 곧장 하나로마트로 달려가 반짝 윤이 나는 디포리와 활짝 피어난 봄동, 고운 무를 사 들고 왔다.
된장국 레서피
달군 팬에 디포리와 대파를 노릇하게 구워낸 뒤 무, 표고버섯기둥과 함께 쌀뜨물에 넣고 육수를 냈다. 쓴맛이 나기 전에 디포리는 먼저 건져내고, 무와 대파가 흐물 해질 때까지 푹 끓여 깊은 맛을 우려냈다. 깨끗하게 체로 걸러낸 육수에 도톰하게 썬 무와 다진 마늘, 친정에서 담근 된장을 한 숟가락 풀어 뭉근하게 끓였다. 하얀 무가 투명해지면서 모서리가 둥글어질 정도로 익으면 한입 크기로 손질해 둔 봄동을 넣어 숨이 죽을 때까지 끓여낸다.
흰쌀밥을 좋아하는 막내는 그렇게 완성된 된장국에 질게 지은 쌀밥을 조금 말아먹고 잠이 들었다. 잠시 후 깨어나 된장국을 몇 입 먹고 쉬고, 다시 약을 먹고 잠들고... 국에 밥을 말아먹고 잠들기를 이틀여 했다.
열이 나기 시작해 꼬박 엿새가 지나자 열이 내렸다. 두통도 함께 나아졌다. 기운을 차린 아이는 된장국 속 투명하게 잘 익은 무를 숟가락으로 건져 먹으며 좋아했다. 이로 씹지 않아도 혀에 닿으면 부드럽게 뭉개지는 무른 무를 막내는 맛있게 먹었다. 아팠을 때는 못 느꼈던 미세한 단맛이 느껴진다며 아이는 진지하게 된장국 맛을 평가했다. "엄마, 배추와 무가 들어간 된장국은 짠데 달아!" 따뜻한 국물이 따끔하게 아픈 목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 같다고. 배추랑 무는 된장이랑 잘 어울린다고 재잘거렸다.
그래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무와 배추는 된장과 정말 친한 친구 같아. 무엇보다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던 네가 된장국을 잘 먹어서 국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야.
조용하던 아이가 다시 말이 많아진 것을 보니 다 나은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나도 이제 마음 편히 짜면서 단맛이 나는 된장국에 고운 쌀밥을 한 공기 말아 후루룩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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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 일기
♪ Mozart: 6 German Dances, K. 509
Pf. 백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