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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룸 May 26. 2024

기타를 위한 시간

당신에게 기타는 무엇인가요?

기타를 위한 시간     



남편은 재즈기타 연주자이면서 음악학원 원장이다. 덕질과 직업이 일치된 사람과 살고 있으니 무엇이 덕질의 영역이고 어느 것이 업무의 영역인지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기타를 더 보관할 수도 없는데 언제나 새로운 기타를 찾고 있고, 기타를 매일 다루지만 정작 기타를 칠 자기 시간은 전혀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기타를 사야 해”라는 그의 말은 늘 한 귀로 흘려들었다.    

  

Fender Flagship Tokyo, 3F


남편에게 말로만 듣던 일본의 음악(악기)시장 규모에 대해서는 올해 초 일본 여행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아시아 최초로 도쿄에 문을 연 펜더 기타 매장 Fender Flagship Tokyo 입구에 들어서자 군데군데 기타 시연을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우리는 3층이야.”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털레털레 따라 올라 간 3층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 케이스 안에 진열된 기타가 시선을 압도했다. 최상급 커스텀 기타 코너라는 건 어마어마한 가격표를 보고 알았다. 남편은 천만 원이 넘어가는 커스텀 기타 진열장 앞을 한참 서성이다 한대를 골랐다.      


시연해봐도 될까요?

-아. 구매하시는 건가요?

먼저 시연해보고요.      


직급이 높아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의 얼굴근육이 잠깐 씰룩거렸다. 그는 데스크 너머로 가서 하얀 장갑을 끼고 돌아와 작은 열쇠로 남편이 가리킨 진열장을 열었다. 슬쩍 보니 남편이 고른 것은 그중에서도 최고가였다. 잠시 튜닝을 한 후 시연을 시작했다.      


이 기타를 주문하면 얼마나 걸리죠?

- 2년 정도입니다.

해외 배송이 되나요?

- 그건 어렵습니다. 도쿄매장에 오셔야 합니다. 주문을 도와드릴까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잠시 고민하는 척 돌아섰다. 밖으로 나온 뒤 남편은 펜더에 큰 관심은 없지만 한번은 가보고 싶었고, 기왕이면 가장 좋은 기타를 쳐보고 싶었다고 했다. “소리가 좋네.” 남편이 말했다. “그러게, 참 배짱이 좋구먼.” 내가 대꾸했다.      


일본 여행 마지막 방문지는 악기 상점가로 알려진 오차노미즈였다. 한국에선 쉽게 못 구하는 다양하고 희귀한 재즈기타를 만날 수 있는 곳. 한번 꼭 가고 싶었던 곳이지만, 남편은 (비싸서) 사지 않을 기타를 보는데 귀중한 여행의 마지막 시간을 들이기를 망설였다. 그를 설득한 건 오히려 나였다. 오기 힘든 곳이니 남편이 직접 보고 사든 말든 후회가 남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돌아가면 다시 온종일 학원 일에 매달려야 하는 남편. 그런 남편을 지켜보면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타가 가져다줄 자신을 위한 시간, 책임과 의무로 채워진 다른 많은 날들을 지탱해줄 삶의 작은 조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차노미즈의 한 아치탑(상판이 아치 모양의 기타로 주로 재즈기타를 말한다) 기타 매장에서 남편은 기타 하나를 발견했다. 1977년산 Gibson-L5. 그가 원한 좀 더 작은 크기의 L4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훌륭한 기타였다. 검정 워크 자켓과 카키색 카고 팬츠 차림의 은발의 남자가 우리를 친절히 맞았다. 한국의 재즈기타 연주자라고 소개하고, 시연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는 흔쾌히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타 시연을 했다. 한 곡에서 다른 곡으로 연주가 쉼 없이 이어졌다.    

  

“좋은 기타네요”  

시연을 마친 남편이 안전하게 기타를 건넸다. 문외한인 내가 듣기에도 정말로 잘 관리된, 잘 익은 기타의 소리였다. 남편은 이 매장에 없는 다른 기타를 더 보고 싶다고 했다.      


“여기가 첫 번째 가게인가요?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쭉 올라가면 많은 가게가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리고 구매는 꼭 이곳에서 부탁드립니다.”      


기분 좋게 시연을 하고 나왔다. 길 끝까지 늘어선 가게마다 둘러보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기타를 찾지 못했다. 이 기타는 펜더의 그것보다 더 비쌌다. 입맛을 다시며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열흘쯤 지나 남편에게 급박한 연락이 왔다. 일본에서 봤던 그 기타와 다른 해에 만들어진 같은 모델을 찾았는데, 적지 않은 금액이니만큼 판매자에게 연락을 해도 되겠냐고 내게 먼저 물었다. 

이 기타는 한 남자의 유품이었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이 유품을 정리하는 중에, 이 기타에 대해 알 길이 없어 수소문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기타를 잘 연주해 줄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일본에서의 판매가에 한참 못 미치는 가격이었다.      


“진행시켜-”      

남편은 일생의 손에 꼽을 정도로 정성 들여 글을 썼다. 기타에 대한 설명과 구매 가능성을 묻는 정중한 문장으로, 내가 봐도 명문(名文)이었다. 그 글은 기타 판매자에게 전송되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이 기타는 남편에게로 왔다. 나중에 들으니 꽤 여러 사람이 구매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했다. 판매자는 그중 남편의 메시지를 인상 깊게 읽었고, 남편이 발매한 재즈 앨범과 유튜브까지 찾아들었던 것 같다.      



이제 남편은 이 기타를 연주하기 위해 애써 시간을 마련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밤, 방음이 잘 된 적막한 학원에서 이 기타를 꺼내어 들면 손을 멈출 수 없다고, 매번 감탄이 나올 정도로 좋은 소리가 지쳐있는 감각을 건드려서 영감을 끌어내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런 충만한 시간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우리가 같이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한 달 전, 나는 오래 관심 있게 지켜본 가구점에서 책상을 주문했다. 오로지 나를 위한 가구를 산 건 신혼 이후 처음이었다. 지금 바로 그 책상에서 남편이 선물한 키보드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높이와 너비가 내게 알맞도록 주문한 책상에 앉으면 등이 펴지고, 경쾌한 키보드 타건음이 계속 손가락을 움직이게 한다. 이 책상에서 나만의 “기타를 위한 시간”이 시작된다.      


“기타를 위한 시간”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가치를 발견하여, 눈에 보이는 시간을 잘 살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이것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있으면 무조건 좋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기타는 무엇이고, 기타를 위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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