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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Nov 24. 2021

흰머리 산신령 1

엘리베이터 안에서 틈틈이 흰머리를 뽑았다. 사방이 거울이고 조명이 환해 소중한 흑발 사이 하얀 불청객을 찾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물론 중간에 누군가 타면 추격은 중단되었지만 나날이 실력이 늘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 타기 전에 볼일을 끝내곤 했다.


여느 날처럼 흰머리를 찾고 있는데 문득 친한 동생의 정수리가 떠올랐다. 평생 흰머리라곤 나지 않을  같던 아이였다. 언제나 뽀얗고 해사했다. 그런  아이를 오랜만에 마주했을  커피를 내리느라 숙인 머리에 그간의 세월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바뀐 것이겠지- 지레짐작해보지만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흘깃 보고  생각은, '너도 늙는구나.' 아니라 '무엇이 너를 늙게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와는 그림학교에서 만났다. 마흔 명이 그림을 배우러 몰려온 곳이었다. 다양한 나이와 출신이 섞인 공간 속에서 통성명이 오갔고, 배움과는 별개로 마음 맞는 이들이 어울렸다. 그와는 어떻게 가까워졌을까. 전화로 그에게 묻자, 자기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웃는다. 새 학기를 맞아 교실에 몰려든 아이들처럼, 그도, 나도,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기 급급 했겠지. 서로에게 강렬하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 그와 햇수로 10년이 되어간다.


당시 타로점을 공부하던 그는 최근에 사주명리로 시야를 넓혔다. 그를 보면, 초원의 짐승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태어났기에 웃고, 울고 그리고 이별한다. 모든 것에 양면이 존재하고,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간결한 눈과 마음을 단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그 공부들이 알고 보면 자연의 섭리를 따른 것처럼 보인다.


그를 만날 무렵 나는 혼돈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다. 아마 무당을 찾아가는 수험생의 심정으로 소문의 그를 만나지 않았을까. 그는 종종 거처를 옮겼다. 그의 집을 떠올리면, 한편에 채 풀지 않은 박스가 쌓여있고 고양이 화장실 모래가 바닥에 부스러져 있던 게 생각난다. 마법사의 조력자처럼, 툽실한 고양이가 바닥에 털 뭉치와 뒹굴었다. 책장이 있었지만 정작 꽂힌 건 몇 권 안되고 모조리 바닥에 쌓여 있었다. 커피를 내려주겠다며 연 찬장은 텅 비어있다. 컵도 수저도 온전히 없는 공간에 예쁘장한 타로카드 데크가 어지럽게 펼쳐져있다. 곧이어 700ml짜리 드립 세트가 마련되고 공간은 금세 향긋한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그의 집이지만 그의 집이 아닌 것 같은 기묘한 느낌. 다른 이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먼저 도착한 그가 마치 자신의 집처럼 문을 열어주며 반기곤 했다. 그에게는 무엇이라는 공간이나 물질보다, 자신이 누구와 있냐는 게 더 중요해 보였다. 스스로에게, 그 순간에 충실했다. 언제나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흠, 한번 볼까...'


어느새 타로카드가 눈앞에 펼쳐진다. 고른 카드를 바라보며 잠깐 동안 흐르는 침묵. 카드를 뒤적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점괘와는 별개로 눈덩이 같은 고민이 녹아 진짜 마음이 형태를 드러낸다. 지금 생각하면, 고민이 풀리지 않더라도 누군가 내 문제를 이렇게 골똘히 바라봐준다는 게 위로가 되었나 보다. 속 깊은 이 아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일에 대해 생각했다는 듯 내가 풀어놓은 고민 보따리를 차근히 둘러보고 적당히 매듭을 지어주곤 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들어주었다.


삶이 고단해서, 스스로가 버거워서, 나에게 확신이 없을 때 그를 찾으면 그는 호수에 홀연히 나타난 산신령처럼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다. 잃어버린 쇠도끼의 행방을 함께 고민해준다. 그리곤 주섬주섬, 호수에서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를 꺼내 모두 쥐어준다. 정작 나는 나무꾼처럼 정직하게 살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언제고 그의 머리에 난 흰머리를 봤을 때, 호르몬이거나 아이의 속 썩임이 아닌 다른 이유로 생긴 듯 한 신비로운 흰 풀 같았다. 그녀는 늙어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 세월 이미 이 지구에서 살았고, 언뜻 보인 저 흰머리는 어쩌면 진짜 산신령이라서일지도 모른다.  


"항상 되고 싶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약하지 않아.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타협하지. 언니는 약하지않아."

 

한때 방황하던 나도, 타로를 점치던 그도, 육아를 하고 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을 따라 혼자 아이를 키우며 생명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매일 새벽 양초를 밝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담담한 어조로 나에게 선한 말을 들려준다. 산신령의 신분으로 그가 이 행성에 사는 동안 그의 호수가 잔잔하길, 나 또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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