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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Nov 25. 2021

흰머리 산신령 2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산신령 친구가 말한다. '주변이 너무 박복한 경우에 귀인이 들어오면 발견이 잘돼.' 사주명리를 공부하는 사람답게 표현이 범상치 않다. 관계에 많이 데여보면 좋은 인연을 보는 눈이 길러진다는 뜻이려나. '귀인'이라. 말 그대로 귀한 존재.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흘려보냈겠지. 산신령 친구가 덧붙인다. '나는 S가 나의 귀인이야.' 그는 웃는다. '내가 첨으로 만난 예민해지지 않는 관계였어서. 내가 예민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네가 그렇다고? 하면서 놀란다니까.' 내겐 그저 평범하고 선하게만 보이던 S가 산신령 친구에게는 귀인이라니. 그저 친한 사이라고 여겼는데 남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나보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가만히 떠올려본다. 그 사람일까?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일까?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스치듯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연락을 주고 받던 사람. 내게 언제나 먹을 것을 사주던 사람. 영화를 같이 보던 사람. 산책을 다니던 사람. '귀인'은 잘 모르겠지만 '소중했던 관계'라고 달리 표현해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언제인지, 어느 시기였는지는 잊었다. 단지 그를 만나던 계절만큼은 또렷하다.


낙엽이 바닥에 구르고 있었고 어떤 날엔 차마 서있지도 못할 만큼 추웠다. 그럴때 그는 언제나 코트 깃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어깨를 움추린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어떤 날엔 시끌벅적한 술집을 갔고 돈이 궁할땐 한적한 홍대 캠퍼스 운동장에 쪼그려 앉았다. 퇴근 시간을 피해 주로 밤에 만났기에 해가  낮시간 만났을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원래 대학 동아리 술자리에서나 마주쳤던 선배였다. 우연히 말을 섞을 기회가 생겼을때 내용이 너무 어려워 가만히 듣기만 했다. 철학을 해서인지 고차원적으로 느껴졌다. 졸업을 하고 다시 만났을때 나는 그림을 그렸고 그는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있었다.  분야 모두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데 주파수가 맞았던 걸까. 희미하지만 행복이라던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같다. 매번 두서없이 만나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해답 비슷한  찾으면 다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런 선배와 둘이서 강릉을 간적이 있다. 계획도, 의도도 없었다.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옆에 '존재'하기로만 한 침묵 여행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어떤 고민이 그를 그 강릉 바다로 이끌었을까 알지 못한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그는 편지 한 장을 쥐어주었다. 언젠가 무심코 건넨 내 한마디가 그에겐 힘이 되었고 망설이던 일을 결심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엔 '구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너 그거, 썸이야.' 관계를 가만히 지켜보던 친구의 말이다. 사랑이란 감정만큼은 확신하던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이상하게 그 단어가 가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정의가 없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번만큼은 서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 대화들이 수면위로 오르면서 우린 서서히 멀어졌다.


 '너무 존경해버리니까 그 사람이 하는 거는 다 배우고 싶고 좋아해 버려서 온순한 강아지가 되는 느낌이야.' 산신령 친구가 말한다. 돌이켜보면 그 선배와도 그랬던 것 같다. 더 공부해서 그가 아는 걸 나도 알고 싶어졌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를 조금 더 자주, 오래 보고 싶어졌더랬다. 사랑 외에는 좀 더 다른 의미로 여겼다면 좋았을것을. 어쨋든 산신령 친구 덕분에 오랜 세월 사랑이라고 속앓이했던 사람이 다르게 다가왔다.


 산신령 친구와 얘길 나누다보면 유독 선배가 생각난다. 선배와 하듯이 이 친구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일까. 선배와 마찬가지로, 산신령 친구도 글을 쓰기 때문일까. 둘 다 가진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언어의 강이 흐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입을 통해 나에게 흘러들어온 이야기가 나의 글이 되고, 또 그 글을 흡수한 그에게 다시 이야기가 되는, 꾸준히 흐르는 강이 있는게 아닐까. 나와 그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 사이에도 그렇게 서로에게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 강은, 긴긴 밤 이야기를 나누던 선배와 나 사이에도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이 된다.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그 시간이 내게 너무 귀했다고. 구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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