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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Oct 31. 2021

떼에 대하여

결국 아이와 모르는 가게 입구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멍하다. 분노도, 허탈함도, 피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명치 한가운데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한 손으로 가슴 중앙을 꾸욱 꾸욱 누른다. 아팠다. 차가 빠르게 다니고 인파도 많은 거리에서 삼십여분간 아이와 실랑이를 했다. 그 여파가 고스란히 명치 가운데 모인 듯했다. 심적인 아픔이 물리적인 아픔으로 전이된 걸까. 어느덧 울음을 그친 아이는 내게 자꾸 달라붙었다.


'아니.' 나는 아이를 제지했다. '오지 마. 얘기 나누고 안아줄 거야.'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2차 울음을 발사할 준비를 한다. 재빨리 덧붙인다. '여기 엄마 옆에 앉아. 엄마랑 얘기 먼저 하자.'


아이를 키우며 내겐 여러 가지 눈이 생겼다. 하나는 아이를 보는 눈, 둘은 아이를 대하는 나를 보는 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와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눈.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아이를 계속 밀어내고 숨을 고르는 나를 보며, 지나가는 이 거리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으며, 어떤 언어로 아이를 대하고 있을까.


아이와의 실랑이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곳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차가 지나가는 대로변이든, 집 앞 구정물이 고인 물웅덩이든, 아이는 상관 않는다. 발을 구르고 때론 뒤집어진다. 이유도 다양하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현관에 걸터앉아 신발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부린다. 도와주려고 나서면 분노한다. 초가을, 얇은 티 한 장을 입고 '아냐, 나 안 추워.'를 시전 하는 아이의 코에 그렁그렁 걸린 콧물. 킥보드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겠다고 내 손을 만류하는 아이 어깨 너머에 펼쳐진 4차선 도로. 다섯 살은 그런 나이였다. 내가 할 거야 , 아니야, 내 거야 시기가 뒤섞여 어른의 여러 설득이 무고해지기 일쑤였다. 다섯 살. 그런 나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이에게 가장 큰 소리를 낸 시기이기도 하고 내 마음이 가장 많이 부서진 시기이기도 하다.


아이를 달래다가 덩달아 내 목소리도 높아졌다. 좌중을 뒤덮는 고성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행동을 멈춘다. 효과는 확실했다. 아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아주 잠깐 동안의 휴전. 그 짧은 순간에, 겨우 큰 소리 한방에 상황이 정리될 리 만무하다. 아이는 다시 보챈다. 마음을 달래려고 시작된 실랑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친절함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친절함. 체력에서 오는 그것. 고성이 터진 이후라면  방지턱 없는 내리막이나 다름없다. 화가 몰려든다. 한번 낸 화는 산불처럼 번져 좀 채로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한대 한 대 맞을 때마다 아이는 펄쩍 뛰며 자지러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음성으로 있는 힘껏 울었다. 상처 입은 작은 짐승 같았다.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이건 아니다,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가 폭력에 맞서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이는 정말이지 있는 힘을 쥐어짜 울었으니까.


정체 모를 화가 모든 걸 태우고 잿빛 후회만 남았다. 아이의 새빨간 눈이 고스란히 모든 걸 기록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끌어올렸던, 내 몸 곳곳을 채웠던 분노가 무서워졌다.


나는 쓰레기구나.

스스로에게 가혹한 말이 나왔다.


'너는 도대체 왜 이러니'에서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로 바뀌었다. 화살이 사정없이 날아와 박혔다. 참지 못했다는 아쉬움, 후회 그리고 작은 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좌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결국 아이는 배우지 못했고 나에겐 무거운 죄명이 생겼다. 약자를 괴롭혔다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물리적 힘을 쓴다는 걸 알았다. 아이를 거칠게 다뤄 차에 태운다던지 안아 올려 집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종료시킨다. 때린 것은 아니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작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인간이라고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 것이다.


투정을 부리면서도 아이는 끊임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두 팔을 벌리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를 받아줘, 이게 있는 그대로의 나야. 이대로 나를 이뻐해 줘. 나는 작고 연약하고 잔인하고 옹졸해. 나는 엄마 앞에서만은 이기적일 거고 마음껏 심술을 부릴 거야. 그래도 엄마가 나를 받아준다면 나는 하늘 끝까지 기분이 좋아져서 또 마음껏 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엄마, 엄마만큼은 나를 받아줘. 나를 비난하지 말고 왜 그럴까 궁금해하지도 말아줘.


아이에게 다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다정하지 못하다는 것과 같다.

아이에게 보이는 상냥하지 못한 모습이 미러링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아주 기묘한 일이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며 자녀와 부모는 거울 같은 존재라는 걸 느낀다.


아이는 아이일 뿐인데. 아이가 떼쓰는 모습은 그 고유의 모습인 것인데.

욕구가 있다면 아이는 언제고 어느 때고 떼를 쓸 것이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기 전까지.

중요한 것은 떼를 쓸 때 나의 상태. 나의 마음가짐. 나의 태도.


다시 숨을 고른다.


'. 옷은 입어야 . 지금은 추워. 콧물도 흘리지. 그러면 옷을 입어야 .'

'네.' 곁에 앉아 어느새 차분해진 아이가 대답한다. 조금 시간을 두고 아이를 바라본다.

'킥보드는 엄마 옆에서 타야 해. 여긴 차가 아주 많아. 아주 빠르고 위험해.'

아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대답을 하기가 급하게 나에게 다가와 팔을 벌린다. '알았어요.' 아이의 따뜻한 품이 나를 감싼다. 토닥토닥. 아이를 안고 조금씩 몸을 흔든다. 가슴팍 통증이 가라앉아 있다. 아까 휘몰아쳤던 분노도, 좌절감도, 어딘가 숨어버렸다.


눈, 귀, 그리고 마음이 하나로 움직여 아이를 미워하기로 마음먹기 전에,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한 조각을 남겨두자 다짐한다. 그건, 눈을 감는 것일 수도 있고, 귀를 닫는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을 잠시 차가운 냉장고가 아닌 따스한 지점, 아이와 함께 했던 사진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실랑이 이후 누가 보든지 간에 도로변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포함이다. 주위의 시선이 따갑고, 아이는 울어서 엉망이고, 무릎은 흙투성이고, 가방은 자꾸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그 와중에 하늘은 너무도 푸르고, 사람들은 즐겁고- 이 모든 것이 한대 섞여 울렁거리지만, 그야말로 밑바닥에 처박힌 마음이 들지만.


어린이집에 늦는 것이 대수인가. 초가을 콧물은 닦으면 되지. 도로가 위험하면 킥보드를 들고 나오지 말자. 무엇보다도, 상냥하지 못한 나를 받아들이자. 이런 순간에, 나를 버리지 말자.


아이를 재우고 흩어진 살림살이를 정리하며 아까의 상황을 떠올린다. 하루동안 부유하던 먼지처럼, 밤과 함께 마음도 가라앉는다. 결국 아까의 기분은 떠나지 못했다. 아무리 주변이 내게 안심과 위로를 보내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하루하루가 쌓여, 엄마가 되나보다.

그때 아이는, 부서져있을까, 아니면 부서진 부분이 있을지라도 잘 다듬어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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