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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Nov 04. 2021

편리한 육아생활

첫째의 유치원 등원 길에 종종 마주치는 엄마가 있다.  아이들은 양쪽에, 아기인 막내는 아기띠에 담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제시간에 맞춰 유치원에 나타난다. 여섯 개의 발자국과  개의 시선이  곳을 향해 행진하는 셈이다. 대롱대롱 매달린 막내의  다리가 일행을 리드한다.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위풍당당해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아기띠는 육아 초반에 등장한다. 아기가 어릴수록 육아용품을 고를 때 심혈을 기울이는데 잠깐이지만 높은 가격에도 너그러워진다. 나 역시 양육자의 척추를 보호해 줄 인체공학적 설계가 되고 아기와의 친밀도도 높여줄 전설의 아기띠를 찾아 많은 밤을 검색에 매달렸다. 하지만 아기띠는 나날이 늘어가는 아기의 몸무게를 지탱하기 때문에 편리함과는 거리가 먼 도구였다. (양육자에게 정말 편한 건 아기띠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하등 편할리 없는 아기띠일 텐데 이 분의 태도는 흐트러짐이 없다. 묵묵히 둘 몫의 가방과 준비물 그리고 막내를 안고 두 아이를 재촉해 언덕길을 오른다. 처음에는 간단한 눈인사만 했는데 등원 시간이 자주 겹쳐 작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돌을 바라보는 아이는 이유식을 먹고 있단다. 이유식. 아기띠에 이어, 까마득히 먼 곳에 두고 온 기억이 손짓한다.


찾아보니 한자로 떠날 (離), 젖 (乳), 밥 식(食)을 쓴다. 태어날 적부터 먹어왔던 모유를 떠나보내며 맞이하는 최초의 식사라니. 기분이 묘하다. 탯줄을 자를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 아기는, 엄마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고 이제껏 물려받던 영양소와 환경에서 최초의 독립을 한단다. 이유식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재료를 준비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이가 조리한 음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면 안도한다. 이 세상에 한 발짝씩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기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음식을 뒤집어쓰고, 온몸에 바르고 놀기 시작한다. 아기가 앞으로 살게 될 이 세계의 낯선 재료들을 소개받는 역사적인 순간. 아기 단계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짧지만 비장한 장면은 한낱 흙장난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이유식을, 셋째까지 만들어 먹인다며 세 아이의 엄마가 웃는다. 아기띠 등반에 이어 이유식까지. 이것이 다자녀 엄마의 포스인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문득 이유식을 만들며 울던 과거의 내 모습이 스친다. 당시 나는 꾸역꾸역 새벽에 일어나 채소를 대치고 흰쌀을 불렸다. 분명 시장에서 파는 이유식도 있는데, 여러 이유로 집에서 만들어 먹였다. 아무렴 영양소에 차이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기띠처럼, 혹은 많은 육아의 물질들이 그러하듯, 나의 아기에게 해줘야 할 특별하고 빠질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강박과 사랑은 한 끝 차이였다.


되돌아간다면 달리 했을까.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면 포기했을까. 보다 쉬운 길로 갔을까. 가끔 의미 없는 되집기를 할 때가 있다. 현재의 육아가 나를 몰아세울 때,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혹시라도 그 순간들에 지금에 대한 답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서이다. 내가 보내온 시간을 누군가가 비슷한 선택으로 보낼 때 과거의 내가 되살아난다. 흐릿했던 힘듦이 또렷해진다. 흔히들 아이가 성장하면서 엄마의 몫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분명 그 양은 줄지만 수제 이유식이나 전설의 아기띠처럼 질적인 고민은 여전하다. 나는 여전히 힘들고, 과거는 반복되고 있다.


세 아이 엄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눈에 들어온다. 안 힘들리 없는데, 그저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사코 뿌리치는 엄마의 어깨에서 아이들의 짐을 받아 든다. 어쩔 수 없다고 느낀다. 어쩌면 평생이 될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아이가 식사나 공간을 떠나 어떤 마음적인 독립마저 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이를 향한 강박의 촉을 세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하듯이, 누군가가 내미는 도움에 손길에 기대야 할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기띠에 안긴 막내가 나를 올려다본다. 듬직한 나무에 열린 열매처럼 엄마 품에 매달려 있는 이 아이도 엄마의 어떤 강박 또는 사랑으로 커가고 있겠지. 아직은 엄마에게서 얻는 영양소로 크고 있지만, 오늘처럼 가을이 무르익을 때 아기띠에서 톡 떨어져 내려와 오뚝하게 서서 걸어 다닐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어엿한 과일로 생활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니 왠지 웃음이 나온다. 그래. 가끔 웃으면 그걸로 된 걸 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편리한 육아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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