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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Oct 24. 2021

소라게 엄마

틴케이스에 담긴 색연필 72개와 A4 사이즈 스케치북, 4*6 사이즈 스케치북 두권, 일기장 그리고 이어폰과 연필깎이. 언제나  가방 속에 들어있는 것들이다. 적고 보면  많아 보이지만 나름 추리고 추린 최소한의 것들이다. 지갑도 뺐다. 대신 체크카드  장만 뒷주머니에 넣어 다닌다. 가벼우려고 노력하지만 가방은 언제나 천근만근. 그래도  이상  것은 없다.  물론,  쓰진 않는다. 아무것도 못할 때도 많다. 시험 며칠 앞두고 공부할 거라며   저책 려서 들고 다니지만  줄도  읽은  모조리 연체되는 꼴이다. 하지만  스케치북을 두고 오면 항상  사이즈가 아쉽고, 오늘은 에스키스만  거라며 흑연을 챙겨 오면 작업대에 앉자마자 색칠이 하고 싶어 지기에, 어쩔  없이  무게를 견딘다.


 어느 날 함께 작업을 도모하는 동료가 몸살 이야기를 꺼냈다. 하루를 마감하고 누우면 그렇게 몸이 아프단다. 아기가 20개월 차인지라 한창 그럴 시기라고 유추하며 육아 이야기가 이어지길 예상하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가방 이야기를 했다. 가방의 무게를 바꾸면서 몸살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출퇴근의 잦은 이동 사이에 짐가방의 무게는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며 새롭게 장만한 미니 가방에 알맞게 들어간 최신 패드도 구경시켜줬다. 콤팩트하고 실용적이고 현대적인 구성이었다. 내 눈길은 자연스레 옆자리에 걸쳐둔 나의 그것을 향했다. 차라리 캐리어를 장만하라며 내 짐을 나눠 들던 지인도 떠올랐다.


집과 작업실 사이엔 가파른 계단이 있다. 세어보니 86개 정도다. 그 언덕을 틴케이스 색연필과 스케치북과 노트가 든 프라이탁 가방을 들고 오른다. 아니 등반한다. 다섯 계단부터 무릎이 욱신거리고 허벅지 근육이 뻐근하다. 등에 이다지도 무거운 짐을 이고 오르내리자니 아이들과 함께 본 책에 등장한 소라게가 떠올랐다. 소라게는 자기보다 몇 배는 무거운 집을 이고 다니는 갯벌 생물이다. 애완으로도 키우는데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물은 수돗물과 바닷물 두 가지 종류로 준비해 소라게가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도록 하고 소금물도 첨가물이 없는 천연이어야 한단다. 갯지렁이나 함초를 먹지만 애완동물이 되면 채소를 먹인다. 이 까다로운 생물은 아가미가 없어 물속에 있으면 질식하고 또 물이 없으면 메말라 버린다. 게다가 어딘가 파고드는 걸 좋아해 완전히 들어갈 수 있는 모래도 있어야 한다. 습도와 온도를 위해 조명도 설치해야 한다. 도대체 이런 손 많이 가는 생물이 어디가 좋아 키운단 말인가 싶지만 소라게도 길들여지기 싫은지 그렇게 사육되면 원래 수명의 반도 못 살고 죽는다. 원래 소라게의 수명은 15년. 아무거나 못 먹고 아무 곳에서나 작업을 못하는 나는 소라게를 닮았구나- 무거운 짐을 여기저기 이고 지고 다니며 작업할 곳을 물색하는 나는 소라게를 닮았구나- 육아 한 만큼 먹고 마셔야 하는 가성비 좋지 않은 나는 소라게를 닮았다고 생각하다 보면 계단 끝에 도착해있다.


갯벌에서 소라게를 잡은 적이 있다. 경계심이 강한지 조금만 건드려도 소라 속으로 쏙 들어가 한참을 숨어있다. 집주인이 숨어버려 일단 집을 구경해본다. 열 마리를 잡아도 모두 튼튼하고 화려하고 예쁜 문양을 가진 소라껍데기들이다. 소라게는 아무 소라를 집으로 삼지 않는다. 신중하게 모양과 크기를 따지고 이사를 한다. 이동할 때도 집개로 소라의 입구를 잰다.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를 보는 것이다. 간혹 말미잘까지 얹고 다니는 소라게도 있는데 녀석은 말미잘을 건드려 말랑하게 만든 후 새로운 소라로 이동시키는 작업까지 한단다. 가만 보니 꽤 귀여운 면이 있다. 집에 대한 애정 또한 대단하다. 자유롭게 떠다니는 물고기들이나 멀쩡한 자기 껍질로 돌아다니는 갑각류들이 보면 미련하기 그지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소라게는 소라게 나름의 철학과 규칙이 있는 것이다.


몸살이 날 정도로, 매일 밤 여기저기 쑤실 정도로 나를 혹사하는 무게지만 들고 다닐 수밖에 없는 나 역시도 그러하다. 결국 소라게는 소라게만의 사정이 나는 나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주변이 아무리 자유롭게 헤엄치고 부유하며 바다를 누빈다 해도, 날렵한 모습을 과시하며 편리한 자동차와 콤팩트한 기기로 작업의 변화를 꽤 한다 해도, 어떤 이는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보다.


말없는 소라게의 철학에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지구 상에 모든 무거운 집을 이고 지고 오늘도 여기저기를 누비는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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