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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Oct 24. 2021

레몬차와 소변의 나날

잠결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으악, 나마저 자다니..!' 둘째를 낮잠 재우려다 옆에서 잠들어버렸다. 낮잠 거부가 심한지라 실랑이를 했더니 나 역시 지쳤었나 보다. 다행히 이번에는 첫째의 하원 시간 전에 일어났다. 전화가 온 것이다. 전화 두 통에 문자 여러 번. 무슨 일일까 봤더니 친구였다. 날 위해 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배달원이 아파트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몰라 어딘가에 두고 가버린 것이다. 사진으로 물건의 행방을 보내준다. 1층 화단이란다. 저곳이 어딜까 비몽사몽간에 눈을 비비다 일단 옷을 입고 나가본다.


현관문 열자 환절기 특유의 차가운 바람과 햇살이 담긴 따뜻한 바람이 섞여 들어왔다. 날씨가 너무 맑고 화창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생각해보니 아픈 아이랑 있느라 어제부터 나가질 못한 것이다. 고작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엄청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밤새 38.4도라는 애매하고도 높은 체온이 나왔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밤새 이마에 미지근한 물수건을 교체했다. 잠이 부족해서일까. 지난 밤이 아득하다.


물건은 배달부가 나름 신경을 써 구석에 잘 숨어 있었다. 담벼락 흙바닥 위에 얌전히 숨어있는 배달음식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단 좋은 일 해놓고 노심초사 상황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에게 인증 사진을 보냈다. 아무 문제없음. 배달 완료. 봉지를 들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레몬향이 퍼졌다. 뭐지 뭐지 궁금한데 강한 레몬향에 더 설레었다. 아이와 함께 읽은 레몬트리의 정원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정원에 도통 나가지 않는 주인공이 이런저런 음식과 디저트를 만들어 정원 친구들과 나누면서 마음이 열리는 이야기다. 그림에서도 강하게 풍기던 레몬향을 직접 맡자 과연, 레몬이구나... 그 존재감이 확실해 작가가 왜 그 많은 재료 중 이것을 골랐는지 알 것도 같았다. 집에 올라와 봉지를 여니 큼직한 스콘과 채 식지 않은 레몬 얼그레이가 들어있었다.


친구와는 종종 물건과 음식을 나누곤 한다. 그런 관계가 있다. 거리는 멀지만 마음을 자주 주고받게 되는, 일부러 시간을 내 보러 가게 되는 사람. 무엇 때문인지는 까먹었지만 그 친구에게 나 역시 커피와 마카롱을 보낸 적이 있다. 친구는 물건을 받고 울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뭐, 그 정도로 감동인가 의아했다. 그런데 막상, 받은 음식을 예쁘게 플레이팅 해 차 한입, 디저트 한입을 입에 넣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친구와는 종종 카페에서 만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함께 뜨개질을 하고 책을 공유하며 나누던 대화들은 고스란히 내 기억 속 소담한 카페 풍경에 녹아있다. 이런 달콤하고 예쁜 것을 먹은 것이 얼마만이던가.

'우린 너무 불쌍해.' 웃음기 섞인 친구의 톡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욱아 동지가 없었다면 인류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출산과 육아를 겪은 사람들이 서로를 아낌으로써 이 관습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을이 키운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것이 그런 맥락이다. 진정한 출산 장려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현재 육아에 처한 사람에 대한 순수한 응원이다. 정부에서 이런 방향으로 지원을 계획해주면 좋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눈물 콧물이 묻은 타르트를 먹는데 아이가 낮잠에서 깨 울기 시작한다. 울면서 잠들면 울면서 깬다더니 과연, 눈을 뜨자마자 분통을 터뜨린다. 다가가서 달래주기도 전에 아차, 다리 사이로 소변이 줄줄 세어 나오고 있었다. 이럴 땐 그냥 누게 둬야 한다. 대충 주변의 물건으로 흐른 소변을 덮고 아이를 안아 화장실로 간다. 화나고, 졸리고, 그 와중에 씻어야 하는 아이를 달래고 닦이고 바닥의 소변을 훔친다. 이런 일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처신은 빠르지만 상황이 끝나면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다.


말끔히 갈아입은 아이에게 아까의 디저트를 대접한다. 언제 울었냐는 듯 아이는 다소곳이 음식을 입으로 가져간다. 물론 나는 그럴 수 없다. 추억과 눈물과 향긋한 레몬과 그림책에 대한 회상은 소변 나라 저 어딘가로 가버린 듯하다. 대신 아까의 난장판이 뒷머리에 쟁쟁 울린다.


언제고 친구의 우정 어린 레몬 얼그레이를 떠올리면 그 향긋한 레몬향과 함께 아이의 화통 같은 울음소리와 다리 사이로 세어 나오는 소변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겠지. 추억은 추억으로 덮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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