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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Jan 09. 2022

검은 바다

작업이 멈췄다. 아이의 아토피가 도진 것이다. 자가격리로 가뜩이나 면역이 떨어진 데다 최악의 미세먼지와 겨울철 건조함이 겹쳐 순식간에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 아토피는 고약한 질병이다. 원인도 다양해 정확하게 파악 못한 채 접근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헤매다 상처만 키우게 된다. 게다가 증상이 심할 땐 잠까지 설쳐가며 긁는 바람에 겨우 딱지가 잡힌 상처에 물집이 터지곤 했다. 지칠 틈도 없다. 거듭 마음을 다잡고 불편한 아이를 달래 재운다. 작은 불을 밝혀 상처를 진정시키고 약을 바른다. 시간이 얼마나 늦었는지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긴 긴 밤, 글 한 줄 끄적이고, 낙서 한 구석 끼적이고 까무룩 잠드는 날이 이어졌다.


한 줌 빛도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를 마주한 적이 있다. 대학 엠티 때였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무렵 숙소 근처 바다가 떠올랐다. 늦은 시각이고 외진 곳이라 가로등 불빛 하나 없었는데 더듬 더듬 걸음을 옮겼다. 어느틈에 바다가 가까워졌는지 발 아래로 서걱서걱 모래 밟히는 소리가 났다. 공기도 시원하게 변하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물이 차오르는 소리, 끈적이듯 단단한 곳에 부딪혀 철썩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를 감쌌다. 걸음을 옮길수록 숙소를 밝히던 불빛이 나를 지나쳐 등 뒤에 남겨졌다. 달마저 숨어버린 밤. 뒤를 돌아보니 불빛이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진다. 바닷물은 어디쯤인가 귀와 코의 감각을 곤두세우며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술에 취해 바다에 뛰어드는 줄 알았던 것이다.


 다시  한가운데 놓이자 그때  검은 바다가 생각난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없이 펼쳐졌던 무한하고도 공허한 암흑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가던  순간. 무언가  너머에 있는 것만 같던 먹처럼 진하고 무거운 공간에 나는 매료되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사방이 나를 조여 오지만  손을 휘저어보면 정작 잡히는  하나 없다. 자진해서 어둠을 찾은적이  있다. 어둠 속의 대화라는 전시였는데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 여러 명이 어둠 속에서 걸음을 옮긴다. 삼십분정도 되는 시간동안 눈앞에 두꺼운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묵직한 어둠이 계속된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소용없다. 어둠만이 왈칵 들어 올 뿐이다. 곧이어 다른 감각들이 깨어난다. 예민해진 귀와 코가 옆사람  스치는 소리, 세재 향까지 모두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몸은  어둠에 적응한다. 불안했던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를 오롯하게 의지하며 내가 느끼는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작업이 멈춘 지금 나는 그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사방이 막혀있는 것처럼 불안해질 때 내 안의 감각이 살아난다. 내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어루만지게 된다. 예민한 아기가 잠들길 기다리다, 상처를 돌보다 가고 싶은 길이 막혔다는 생각에 괴로와지면 검은 바다를 떠올린다. 허우적거리던 마음이 가라앉고나면 지금을 가만히 주시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쥐어짜내듯 얘기 한줄, 아무 생각없는 낙서 한 조각이라도 남길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떤 곳을 향해 오늘의 폭죽을 쏜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불빛은 광활한 어둠 어딘가를 밝히다 점이 되어 사라진다. 어둠은 터무니없이 넓고 내가 쏜 불빛은 너무 작고 약하다. 기운차게 날아가는가 싶더니 멀리 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야속하다. 그래도 계속 쏘아본다. 주섬주섬, 그날 준비한 폭죽을 꺼내 불을 붙인다.


 -나는 어둠을 밝히려고 불을 쏘는 게 아니야.


새벽에 깬 아이를 달래며 되뇐다.

그저 이곳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싶을 뿐이야.

지금 이 칠흑 같은 어두움도 나를 가로막는 어두운 바다도 모두 그저 마주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것에 삼켜지는 게 아니라고 주문을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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