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목요일 약

by 이주희


지난해 서양에 처음 가봤다. 엄청 큰 에버랜드에 온 것처럼 멋있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전에 갔던 오키나와의 고요한 해변도 예뻤고 세부의 깊고 화려한 바다도 근사했다. 어쩌다 가는 여행이지만 분명히 아름답고 좋았다. 뭐가 그랬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 갔다 왔나 싶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말끔하게 잊어버리고 만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끈적끈적한 공기가 감겨오던 오래된 첫 여행이 오히려 또렷하게 기억난다.

끊임없이 독촉받는 채무자처럼 지긋지긋한 생계를 피해 야반도주하듯 인도로 갔다. 인도는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적은 돈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그렇다는 거다. 아르바이트를 몇 탕씩 뛰어 비행기 티켓을 샀다. 편도로 사고 싶었지만 왕복이, 두 달 후 출국하는 표가 제일 쌌다. 일정은 그렇게 결정됐다. 휴대폰을 정지하고, 배낭은 친구에게 빌리고, 카메라가 없어 세일 중인 4분할 토이 카메라를 샀다.

도착하자마자 더위를 먹었다. 게스트하우스의 한국인 여행자들이 얼음을 사다 이틀을 꼬박 돌봐주었다. 삼일 째 날,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맥그로드간지로 가는 그들의 피신 행렬에 붙었다.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곳에 살았다. 그러니까 누가 나에게 인도는 어땠냐고 묻는다면 민망해진다. 인도 기차에서는 짜이 마신 컵을 창밖으로 그냥 던진다면서요? 바라나시에서는 정말 강물에 시체가 떠다니나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두 달을 살면서 오가는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 인도를 여행했다.

맥은 산골짜기에 있는 아주 작은 동네다. 티벳 난민들과 인도인들이 모여 산다. 길은 몇 개 없다. 터미널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서점과 빵집이 있다. 멀리 보이는 마을까지 걷다 보면 산책하기 좋은 숲과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가운데 길로 가면 루프탑 전망이 기가 막힌 까르페디엠이 있다. 꼬불꼬불한 길을 돌면 달라이라마가 산다는 사원이 있다. 그 입구에 카메라 가게가 있다. 오른쪽으로 내가 살던 게스트하우스와 티벳 스님들의 기숙사가 있다. 딱히 방에서 할 일도 없고 때때로 나오는 도마뱀과 전갈이 싫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을 나왔다. 손바닥만 한 곳이라 동네 사람들도 그만큼 자주 만났다. 인사를 하고 못 하는 말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친구를 만나고 가족을 만났다. 서점 총각의 누나가 결혼하는 날 초대를 받았다. 1박 2일의 동네잔치였다.


돌아가는 날 맥의 친구들은 반나절을 꼬박 가야 하는 델리까지 배웅을 해줬다. 내가 공항에도 제대로 못 가는 어리바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 후 몇 번 메일을 주고받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흩어지고 사라졌다. 떠나봤자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나는 체념할 줄 아는 채무자로 돌아갔다.

그래도 혹시나 가끔 기대 없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편해졌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고, 청결해지고, 짧아졌다. 여행을 갈수록 여행이 가고 싶어진다. 언제까지나 그럴 거라는 걸 아는데 어째서 나는 지도를 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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