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초저출산이 공동육아에 미치는 영향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회의가 열렸다. 어린이집 조합원 중 누군가가 경제적인 문제로 갑자기 탈퇴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재정 공백을 의논하던 중에 4세 아이를 추가로 모집하고 6, 7세 아이들을 한 반으로 통합하는 것에 대해 같이 의논해 보자는 자리였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운영은 조합원으로 가입한 사람들이 내는 출자금과 달마다 내는 보육료로 유지된다.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돈으로만 충당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정해진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어린이집 나름의 기준을 지켜 가고 싶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제 갓 이 어린이집에 들어간 새내기 조합원이니 목소리 높여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이야기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덕분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발짝 떨어져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얼마 전 보았던 신문기사의 내용이 새삼 절절하게 다가왔다. 회사에서도 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매출이 준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출산률 저하가 내 삶에 이렇게 전방위로 영향을 주는 것일 줄을 정말 몰랐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순간 부모는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재정 문제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 숫자가 줄고, 조합에 가입하려는 부모가 적어진다면 그 어린이집의 존폐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문제다. 아무리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하려고 애를 쓴다 해도, 더이상 아이를 보내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1995년에만 해도 70만 명을 넘었던 연간 출생아 수는 2000년 63만 명, 2001년 55만 명, 2002년 49만 명으로 빠르게 감소했다. 매년 십만 단위 숫자가 달라질 정도로 극적인 급감이었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불과 몇 10여 년 사이에 20만 명 이상의 소비자가 사라져 버린 상황이다. 앞으로 사교육 시장이나 대학 정원 등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은 2015년 892만 명인 6~21세 학령인구가 5년 뒤인 2020년엔 782만 명으로 100만 명 이상 줄 것으로 예상했다.
10년 뒤인 2025년엔 708만 명으로 감소한다. _ 중앙일보, 2017년 2월 22일
현실이 이렇다. 공동육아가 처음 출발하던 시절에는 '공동육아'라는 철학을 공유하고 확산하는 일에 집중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넘쳐나던 그때와는 상황이 또 다른 것이다.
게다가 자연 교육, 생태 교육을 내세우거나 공부시키지 않고 마음껏 놀게 하겠다는 대안 어린이집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비단 '공동육아'가 아니더라도 부모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예전에 비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이 어린이집의 조합원들이 고민하는 것은 비단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어린이집들 또한 겪고 있거나,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사람들은 각자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어떤 식으로 해결할 것인지 의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어떤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이 두 명 이상만 모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혼자서도 자아 분열이 되는 것이 인간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스무 명이 넘는 가구, 마흔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꿈이야 꿀 수 있지. 처음엔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다 보면 다름을 좁힐 수 있고,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라는 아름다운 환상.
그러나 서로의 입장 차이가 분명한 사안일수록, 결론을 내리려면 어느 한쪽이 자기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다.
아이들마다 상황이 다르고, 집집마다 경제 사정도 다르다.
조합원 탈퇴로 인한 재정 공백을 출자금 추가 납부로 메워 보자는 의견도 있을 수 있고, 돈 문제랑 아이들 연령별 통합 교육을 묶어서 생각하지 말자는 의견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니 결국은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다수결이 때로는 횡포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것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그러나 다수결에는 반드시 전제가 따른다.
그 결정이 소수가 주장하는 의견보다 훨씬 더 득이 크다는 확신, 소수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접어도 될 만큼 구성원들이 확실히 문제의식을 공유했다는 확신, 그리고 그 결정이 현 단계에서 최선이라는 동의.
주변의 모든 사람이 싫다고 하니까 나는 좋은데 좋다고 말하지 못할 때, 난 아무리 봐도 별로인데 다른 이들은 그것을 칭찬하니까 그냥 같이 좋다고 말해 줄 때가 있다.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느 쪽에 전폭적으로 동조하지 못하는 것으로 내가 곡해당하지 않을까, 따돌림 당하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신경 쓰이고 궁긍적으로는 저들 말대로 내가 틀린,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게 아닐까, 라는 자기부정의 공포를 갖게 된다.
자신의 소신을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 간다. 대다수의 의견과 일치한다면 안전하대고 간과하기에 딱히 자기 생각을 의심하진 않지만,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이면 마음 한편으로 '내 생각이 과연 맞는 생각일까'라는 자신에 대한 의심을 끊임없이 품는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가진다. 그런 번거로움과 불안함이 싫어지면, 소수 의견을 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양극단화된 목소리의 사회가 되어진다.
<태도에 관하여> 중에서 (임경선, 한겨레출판)
출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표지 시안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안이 좋다고 모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고, 사람들은 이미 그 회사의 표지 디자인 방향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택을 알아서들 하고 있었다.
디자인실장의 권위를 넘어설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어차피 얘기해도 안 될 거야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젊었던 나는 이쪽 방향보다는 저런 방향이 좋을 것 같다, 뭘 이야기하려는지 모르겠다, 다시 잡아 보면 좋겠다, 겁도 없이 마구 이야기했다.
결과는?
디자인실장과 편집부장이 타협 보는 방향대로 흘러갔고, 나는 좀 되바라진 아이, 혹은 뭣도 모르면서 나불대는 아이 정도의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막상 시장에 나간 책은 표지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서점 관계자, 독자, 저자의 주변 인물들에게 몇 번이나 들어야 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실은 나도 그 표지가 참 이상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같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회의할 때는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에이, 튀어 봐야 괜히 나만 이상해져."
사회 초년생이어서였을까. 내게 정말로 이상했던 건 바로, 선배들의 그런 태도였다.
내가 바라는 결론대로 나지 않는 거? 그건 괜찮다.
내 의견이 늘 옳을 수도 없고,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건 존재하는 거니까.
그러나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남들이 결정하는 걸 '관망'만 하다가 뒷담화나 하는 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적어도 어린이집 회의에서는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이 드러나 상처를 받는 이도 분명히 있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는 건, 서로의 생각이나 날카로움을 숨기고 유야무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좋았다.
100퍼센트 흔쾌한 동의, 라면 무엇보다 좋겠지만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이상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랜 회의 끝에 결국 자두와 같은 나이, 그러니까 가장 어린 4세 아이들을 더 모집하고 모자라는 공간 문제는 예닐곱 살 아이들의 통합 교육으로 해결하기로 결론이 났다.
이 결정이 모두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운영하는 문제가 남았다.
선생님들의 부담은 더 커졌을지 모른다.
회의에 함께 참여한 교사회 입장은 명확했다.
이런 결정이든 저런 결정이든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너무 걱정은 마시라, 아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결정은 아닐 것이다, 교사들을 믿으면 된다!
어린이집에서 결정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 과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감동이었다.
오랜 회의, 동어 반복 등으로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두를 위해 옳은 선택을 한 것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드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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