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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ug 24. 2018

이 땅의 모든 언니,
그리고 누이들에게


우리 큰언니는 1966년생이다. 경북 청송 깊은 산골짜기에서 다섯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공부를 무척이나 잘했지만, 집에서는 한사코 장남인 큰오빠에게만 기대를 걸었다. 어렸을 때, 큰언니의 일기장을 어쩌다 같이 들여다본 일이 있다. 날마다 학교 갔다 와서 소 꼴 베고, 밥 하고, 일했다는 이야기밖에 없었다.

"뭔 일기가 날마다 이래 똑같노?"

언니는 까마득한 일이라 생각도 잘 안 난다 했다. 그때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보았던 그 일기장이, 나이가 들수록 사무친다. 그래 봐야 고작 열두 살, 열세 살, 갈래머리 작은 계집아이가 밭에 나간 엄마 대신 밥을 하고 소죽을 끓이는 장면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르면 나는 작게 한숨을 쉰다. 

시골에 살다가는 자식들도 똑같이 농사나 짓고 살 거라는 아버지의 결단으로, 우리 식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대구로 이사를 했다. 농사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아버지가 처음 차린 작은 구멍가게는, "잘 팔리는 것만으로 싹 진열해 드릴게" 하는 업자의 사기 덕에 파리만 날리다 곧 접게 되었다. 그 사람이 "싹 진열"해 주었던 물건들은 죄다 안 팔려서 창고에 쌓여 있던, 처치곤란 물건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아무튼 도시 학교에 다니게 된 뒤에도 큰언니는 여전히 공부를 잘했다. 엄마나 아버지는 여전히 큰오빠에게 기대를 걸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에 학교 전체 1등인가를 했던 언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집안 형편이 이런데 오빠가 대학을 가고, 언니까지 대학엘 가면 동생들 공부길이 막힌다는 생각이었다. 깜짝 놀란 학교 선생님이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부모님을 불렀고, 덕분에 언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역시나 제법 공부를 잘했던 그 아래 작은언니는 바로 밑 남동생이 대학엘 가야 하니, 자연스럽게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공부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작은오빠는 대학엘 갔고, 막내인 나는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은 언니 오빠들 덕에 어부지리로 대학생이 되었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냥, 그런 시절이었다.

큰언니에게 작은언니는 지금까지도 아픈 가시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그때 대학엘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소리를 한다. 


홍정욱 선생의 <우리들의 누이>를 만드는 동안 '우리들의 언니' 생각을 많이 했다. 희생을 희생인 줄 모르고 살아온 고마운 분들 덕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교정을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가만히 대고 "하아.. " 하고 숨을 참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한다. 


2015년, 홍정욱 선생에게 처음으로, 돌아가신 누나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얘기를 들으며, 이걸 꼭 책으로 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직업병일까. 논문에서 다루어지는 '여공' 이야기는 숫자에 갇혀 있거나 피상적이었다. 투쟁하거나 시대와 불화하며 장렬하게 싸웠던 '여성 노동자'들 말고, '전태일' 말고, 그냥 그렇게 시대를 살다 간 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다룬 작품이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홍정욱 선생님을 졸랐다. 꼭 쓰셔야 한다고, 써 달라고. 몇 번이나 고사하는 선생님을, 이제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게 된 누나를 대신해 그 삶을 들려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고 몰아붙였다. 못된 편집자 같으니라고. 


겨울을 지나는 동안 <몽실 언니>를 다시 읽은 홍정욱 선생은 "시대를 증거하는 글의 힘"을 알게 되었다는 편지를 써서 보내 왔다. 그러고는 2016년 2월, 도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포기하겠다는 편지를 다시 보내 왔다. 나는 신경숙의 <외딴 방>을 이야기하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이야기하고,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이야기하면서, 괴로워하는 작가의 부채의식에 돌덩이를 얹었다.


"누군가의 죽음,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서사이기는 하나 결국은 시대를, 세상을 깨우는 소리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보면, 선생님이 지금 느끼시는 그 뒤숭숭함이나 혼자만의 중얼거림으로 끝나 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막막함에도 끝끝내는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기록하고 남겨야 하는 자의 숙명이 아닐런지요.    

그 시절의 주인공이어야 할 "언니들"은 당신들 스스로의 입으로는 절대로 그 시절을 제대로 세상에 내놓지 못합니다. 식자가 아니어서,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그게 뭐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결국은 '남성'인 연구자에 의해서나 '남성'인 문학인에 의해서나 겨우 이야기될 뿐이지요.

선생님 역시 '남성'인 동생이지만, 누나의 입을 빌어 이야기를 하기에 넘칠 만큼의 감성을 가지신 분이시니까요.

언제가 되더라도 선생님의 이야기, 꼭 듣고 싶습니다."


소설을 포기했던 홍정욱 선생은 그해 8월, 뜨거운 여름볕을 딛고 임진강을 걷고 돌아온 뒤 다시 한번 누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가치가 있을지 반문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것' 뿐이었던 누님의 삶이 

산업화가 삼켜버린 농촌문명의 황폐화와, 그 세세한 실상과, 속속들이 인간을 흩어버린 물신주의의 팽창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에, 마른 시레기 같은 이런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당연히 필요한 이야기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그저 기다렸다. 누이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는 없나, 자꾸만 피하려 드는 작가를 가만히 기다렸다. 술에 취해 마음이 허청거리는 날에도, 누이가 살던 방에 혼자 다녀와 서럽게 울던 밤에도, 작가의 마음이 누이의 입으로 발화하기를 기다렸다.

홍정욱 선생의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으시고, 병원을 오가는 동안에도 작가는 마음에서 누이의 이야기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드디어 2017년 7월, 방대한 초고가 내 손에 왔다.


"지나간 시절의 아픔에 우는 게 사람의 마땅한 몫. 넋두리나 수다로 읽히지 않기만 바랍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초고를 출력해 찻집에서 읽어 내려가다 서럽게 꺽꺽대는 바람에 '저 여자 미친 거임?' 하는 노골적인 눈빛을 받기도 했다. 홍정욱 선생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누구라도 이 글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글을 '넋두리나 수다'로 읽는 이가 있다면 그건, 이런 삶을 단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이의 배경 탓이지, 작가 탓이 아닐 거라 믿었다.

    

"저는 살면서 쌓았던 눈물 같은 것을 다 쏟았다고 느낍니다. 그래도 개운한 마음이 괴롭습니다.

없는 일로 넘겨도 됩니다. 저는 이미 충분했습니다."


이미 충분했다는 말에서 많은 것이 느껴졌다. 감히, 한 생의 마지막까지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던, 편집자라는 나의 직분을 다해야 할 때였다. 그때부터는 편집자의 시간이었다. 원고를 가르고, 삭제할 분량을 정하고, 방향을 다시 잡고, 저만치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몇 차례,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온갖 잡무에 시달리다가도 <우리들의 누이> 교정지를 붙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순식간에 나는 1970년대의 가난한 시골집으로, 19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코피 쏟는 일상으로 경건하게 흘러들어갔다.

 

책에 싣지 않고 통으로 삭제한 글에도 가슴을 치는 대목들이 참으로 많았다. 작가 홍정욱은, 공장에 간 누이가 편지를 보내 오면 엄마가 마음 아파할 대목은 슬쩍 빼고 읽었다는 동생이었고, 누이가 헌책방 골목에서 사 준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또 읽는 동생이었고, 야학 교사가 된 뒤에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누이에게 잡힌 손을 쭈뻣쭈뼛 빼는 동생이었다. "내가 무얼 안다고!" 노동해방 구호를 외치면서 누이를 볼 때마다 미안하고 부끄러워하는 그런 마음을 잊지 않는 동생이었다. "살아서 한 나절도 편히 쉬어 보지 못한 누이"를 보내고 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누이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특별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보다 더 힘들고 모진 삶을 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당신보다 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바라던 삶을 성취한 사람도 있고, 뒤틀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몸을 바친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이 뒤틀린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주어진 숙명이라 생각하고 앞가림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누구보다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무단히 욕심내지 않았고, 내 손에 든 것이라도 내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덜 가진 사람을 못 본 척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이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강바닥에 흔해빠진, 제각각으로 생긴 돌멩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그림자에 속아 고개가 꺾인 사람들이, 헛헛한 가슴을 안고 빈 다리를 툭툭 차며 들어간 집에는, 언제나 따듯한 밥상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들이 평생 지었던, 그런 밥을 먹은 사람들이 모은 힘이라야, 모진 데로 흘러가는 강물을 제대로 휘어잡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표지 그림은 김도아 작가에게 부탁했다. 알고 그런 것은 아닌데, 마침 김도아 작가의 언니가 핸드볼 선수였다고 한다. 이런 우연이라니! 홍정욱 작가의 누이가 처음으로 '꿈'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 것이 핸드볼 때문이었다. 김도아 작가는 이 작품이 자신에게 온 것이 운명이라 여겼고, 날마다 멍이 든 채 돌아오던 언니를 어루만지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렸다. 결과는 보시는 바와 같다. 이 그림 하나로, '우리들의 누이'가 따뜻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참으로 감사하다.


2018년 8월, 그렇게 책은 태어났다. 이제 이 눈물겨운 삶이 많은 독자들의 손에 가 닿아 나와 같은 마음으로 흔들려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살다 간 우리들의 누이 이야기


누이는 이름이 두 개였다.

나이도 두 개였다.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나이로

도시의 공장으로 떠났다.

누이는 열다섯이었다.


아파서 떠올리기 힘든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서 더욱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뜨거운 가슴으로 읽어 주시라.

그리고 기억해 주시라.

그렇게 살다 간 삶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살다 간 이들의

삶을 딛고 있음을. 


                                            - <우리들의 누이> 뒤표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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