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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Dec 28. 2018

12월 28일, 수전 손택의 14주기에 즈음하여

_<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출간기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 정우성의 인터뷰가 실렸다. 기자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사실 끝까지 읽은 책이 별로 없어요. 하하하. 그런데 이상하게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은지 책 선물이 많이 들어와요. 굳이 추천하자면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우리가 안방에 앉아 타인의 고통을 미디어로 접하다 보니 얼마나 그것에 무뎌지고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책이예요.”

라고 말했다. 역시 정우성! ^^


나 또한 <타인의 고통>을 처음 읽었을 때의 불편했던 감정,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각성들이 지금도 또렷하다.

이미지를 통해 전쟁을 소비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속 풍경을 이토록 철저하게 까발린 책은 지금껏 없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이미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빠른 속도로 변해 가는 요즘이야말로,

<타인의 고통>과 <사진에 관하여>에 담긴 손택의 성찰이 더욱 요긴하다.


문화 비평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 하는 정답을 보여 주는 <해석에 반대한다>와 <우울한 열정>,

암에 걸린 자신을 '환자'로 규정할 수 없어서 써내려간 <은유로서의 질병>까지,

손택이 남긴 저작들은 어떤 걸 집어들고 읽어도,

왜 손택에게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니,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니, '행동하는 도덕주의자' 같은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지 곧바로 긍정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파리에 있는 몽파르나스로 손택의 무덤을 찾아간 것이 2008년의 일이다.

손택의 소설 <인 아메리카>를 편집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손택에 대한 애정에 한껏 고무되어 있을 때였다.

2007년에 내가 작업한 <문학은 자유다>, <나, 그리고 그밖의 것들> 같은 책까지 생각하면, 손택도 한국에서 자신의 책을 여러 권 편집한 내가 찾아온 것을 꽤 반겨 줄 것이라 제멋대로 믿었다.

같은 묘역에 있는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무덤에는 사람들이 엽서나 꽃, 화분 같은 것을 잔뜩 놓고 갔는데 손택의 무덤은 규모에 비해 외로워 보였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세계를 뒤흔든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아름다운 로맨스류를 좋아하지, 고뇌하고 괴로웠던 손택의 삶을 동경하진 않는 모양이군, 그랬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작가의 텍스트를 책으로 만들 수 있는 행운을 얻은 내가 손택의 유작들까지 멋지게 갈무리해 보자는 다짐의 자리이기도 했다.


2013년 11월에 첫 번째 일기 <다시 태어나다>를, 올해 12월에 두 번째 일기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를 출간했다. 세 번째 일기가 숙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손택에게 지켜야 할 어떤 약속을 지켜낸 것 같아 뿌듯하다.


“예술가가 된다는 건 감히 다른 사람들이 꿈도 못 꾸는 실패를 한다는 것이다……. 실패는 예술가의 세계다…….” _ ­1966년 8월 8일 일기 중에서


손택이 남긴 일기를 읽다 보면, 좀 더 편하게 지내도 좋았을 텐데, 싶어 안타까운 대목들이 많다.

스스로 되고 싶은 인물을 정해 놓고, 쉼없이 읽고 쓰고 행동하는 손택의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대학생이 되자 토마스 만을 찾아가 문학을 논하는가 하면 마르쿠제니, 롤랑 바르트, 엘리아스 카네티, 라이오넬 트릴링, 폴 바울즈, 조셉 브로드스키, 피터 브룩에서 조셉 콘래드까지, 엄청난 인물들과 무시로 교류한다. 이미 뉴욕 지성계의 중심이 된 뒤에도 새로운 지적 자극을 찾아 끝없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절망적인 모습을 보인다.

연인과 헤어진 뒤 슬픔의 절정에서 쓴 일기들이 많다 보니 더욱 그렇다.  


이번 책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여러 모로 뜻깊다. 

손택이 명실상부 뉴욕 지성계의 여왕, 으로 자리한 손택 절정기의 일기들이라 전 세계 작가, 예술가, 사상가들과 교류하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절망의 순간에 침잠하는 때의 기록이 많기는 해도, 사랑했던 여인들과 헤어질 때마다 손택이 그 절망을 창작의 에너지로 전환시켜 가는 모습. 창작열로 전환시킨, 대단한 실패담들을 확인하는 것도 독자로서는 즐겁다.   

그토록 바랐던 작가로서의 성공 이후에는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상태였으나, 오히려 더 열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 기꺼이 다른 이에게 배우고 또 배우는 손택을 통해, ‘작가의 태도’에 대해 곱씹어보게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수전 손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확인시켜 주는 아포리즘의 향연!! 절망에 빠진 한 인간이 지성계의 거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하는 짜릿한 경험을 선사한다.  


지성인으로서 얻어야 할 모든 것을 다 얻은 뒤에도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다 얻었다 싶었던 때에도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로워했던 손택의 나날들이 궁금하다면

손택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를 읽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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