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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r 05. 2019

그리운 임길택 선생님

_ 장식 없이 정갈하고, 꾸밈 없이 진솔하면서 담백한 글들

1985년에 초판이 나온 조세희의 에세이 <침묵의 뿌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85년 2월에 나는 두 번째로 사북에 갔다. 그리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며칠을 앓았는데, 그때 나는 사북 어린이들이 쓴 글을 읽고 또 읽고는 했다. 사북에서 태어나 자라 그곳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이 된 어린이는 얼마 안 되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따라다녔다. 어떤 어린이는 농촌에서 왔고, 어촌에서 왔고, 대도시 주변 지역에서 왔고, 어떤 어린이는 굴뚝이 수없이 내다보이는 공장 지역에서 그곳 학교에 다니다 옮겨 왔다. 그 어린이들이 저희가 사는 지금 세상을 그려 등사판 글모음집에 담아놓고 있었다. 나는 사북에서 어렵게 구해 온 몇 권의 어린이 글모음집을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책으로 보관하고 있다. 그 글모음집들을 처음 읽었던 것은 어느 고마운 광부의 하숙집 가운데방이었다. 내가 어린이들의 글을 읽는 밤에 스스로를 ‘13도 공화국의 몹시 지친 국민’이라고 소개했던 갑반 광부는 잠을 자고, 서울 사람들은 모두 잘 사느냐고 물어보던 병색 완연한 병반 광부는 을반 광부와 교대하기 위해 1천 3백 미터 지하로 일을 나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소설가 조세희가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책’으로 여긴다던 그 문집이 바로 임길택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들이 쓴 글을 모아 엮은 문집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문집은 문인들에게도 꽤나 유명했던 모양으로, 이 문집을 본 뒤 “우리 같은 작가들은 다 붓 꺾어야 돼” 소리가 심심찮게 나왔노라는 뒷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침묵의 뿌리>에 실려 있는 아이들의 글은 어찌나 솔직한지, 또 어찌나 아프던지…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들을 만나러 가서 가만히 손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내 얼굴     


_ 5학년 김상은


삼학년 때 밥을 안 싸 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이 없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 

     

어머니


_ 5학년 나용채


우리 어머니는 밥을 잘 안 먹는다. 그러면 나는 밥을 먹으라고 한다. 그래도 밥을 안 먹는다. 

나는 또 밥을 먹으라고 한다. 그러면 몇 숟갈 먹다가 안 먹는다. 많이 먹으라면 너나 많이 먹으라고 한다. 그때 나는 어머니 밥 안 먹으면 나도 안 먹는다고 한다. 그때 형들은 맛있다고 먹는다. 나는 그거 보면 형들이 얄미워 보인다. 

       



아이들에게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일기장에 쓰게 하는 선생님이라니! 까맣게 탄가루를 쓰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아버지 얼굴 화장했네”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과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던 분이 바로 임길택 선생님이다.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임길택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 이분이 얼마나 아이들 마음 가까이 가서 머물렀던 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작고 여린 것들에 곁을 내주고, 느리고 찬찬한 것들에 오래도록 마음 써 주셨던 선생님의 정갈한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는 시들이 <할아버지 요강>에는 담겨 있다.     


할아버지가 농약을 잘못 치고 돌아와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된 날의 저녁 밥상 풍경을 그대로 옮긴 「할아버지와 농약」을 보면 상처받은 이의 마음을 이렇게 잘 묘사하기도 참 쉽지 않겠단 생각이 든다. ‘길 가기 힘든 이들 모두 태우고 / 언덕길 함께 / 오르고만 싶다.’는 구절이 담긴 시 「완행 버스」는 선생님이 살고자 했던 삶 그대로를 담았다.

‘이런 순덕이도 이 다음 이 다음 /가난이 무언지 알 때가 올까. / 돈이 없어 아버지 계시는 병원에 못 가 본 / 지금의 일들 떠올리며 / 남 몰래 혼자 울 때가 있을까.’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안타까운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시 「순덕이」는 또 어떤가.   

  

임길택 선생의 시들은 모두 머리로 쓴 시들이 아니라 직접 만난 사람들, 손수 가르친 아이들, 오래도록 마음을 주고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래서 장식이 없고, 꾸밈이 없고, 진솔하면서 담백하다. 정갈한 시골 밥상을 마주 대한 듯 따뜻하면서도, 반찬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이 너무 절절해 눈물나는, 그런 시들이다. 그런 시를 쓸 수 있는 건 시인의 삶이 그러했던 까닭이겠다.    

 



“나는 누가 울 때, 왜 우는지 궁금해합니다. 아이가 울 땐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를 울게 하는 것처럼 나쁜 일이 이 세상엔 없을 거라 여깁니다. 짐승이나 나무, 풀 같은 것들이 우는 까닭도 알고 싶은데, 만일 그날이 나에게 온다면,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아직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우는 것들의 동무가 되어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아이, 어른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려 합니다."

    



<할아버지 요강> 서문의 한 대목이다. 이 가운데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는 나중에 나온 유고 산문집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눈물 흘려도 괜찮다고, 약해도 된다고, 가만히 다독여 주는 글, 위로가 되는 문장이다. 

그래서인지, 임길택 선생님의 시에 붙인 곡들은 마음을 참 곱게 만든다. "굴렁쇠" 아이들이 부르고 백창우가 노래로 만든 <할아버지 요강>의 시 중에는 「흔들리는 마음」, 「아침 숲」, 「가을 까치집」, 「영미의 손」이 참 좋다.

임길택 선생님은 병상에 누워서도 아내에게 시를 받아 적어 달라고 할 만큼 시를 사랑했던 분이다.(아내가 받아 적은 마지막 날들의 시는 유고 시집 <산골 아이>에 담겨 있다.) 

임길택 선생님의 시를 읽다 보면 평생 아이들과 시와 자연을 사랑했던 이의 마음에 저절로 감화되어 마구 착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날 아침 아이들은 모두 그 진달래꽃이었다        


시뿐 아니라 동화들도 참 좋다. 동화집 <수경이>에 담긴 동화는 모두 임길택 선생님이 가르쳤던 아이들을 모델로 한 이야기들이다. 두메산골 마을, 탄광 마을, 작은 시골 마을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 마음속에 자리잡은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내 작품으로 담은 셈이다. 


표제작 「수경이」의 주인공 수경이도 한사코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그런 아이다. 조카가 떠나자 혼자 잠들어야 하는 할머니의 허전함이 걱정되어 베개를 들고 건넛방으로 가는 그런 아이. 농사일에 지친 엄마와 아버지를 도와 손을 보태는 게 너무도 당연했던 시절의 이야기, 일이 너무 많아 얼른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의 바람, 가난한 살림살이에서도 모나지 않게 자라는 아이의 고운 심성이 잘 담겨 있다. 

언젠가는 사라져 갈 아름다운 풍경들을 안타까워하는 「꽃산길」의 순정이, 친환경으로 지은 양파 농사가 망하게 생겼는데도 고집을 버리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선진적인 작품 「아버지와 양파」의 성현이, 제기차기하는 아이들 모습을 가감없이 실은 「아궁이 앞」의 기석이와 순택이, 「뻐꾸기 소리」에 나오는 딸부잣집 은경이, 모름지기 선생님은 어떠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던 금주의 이야기를 담은 「금주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선생님께 뺨을 맞은 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글을 남긴 아이의 이야기 「선생님, 저 혜숙인데요」까지. 아이들 모습이 하나같이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다. 오랜 관찰, 애정이 담긴 관심이 아니었다면 살려 쓰기 힘들었을 장면들이 가득 담겨 있다. 


특히 좋았던 것은 「영심이, 탄마을에 피어난 꽃」이다. 산문집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에도 실려 있는 글이다. 학기 초, 아무도 옆자리에 같이 앉으려고 하지 않았던 아이가 영심이였다. 그러다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결국 반 아이들 모두의 마음에 가 닿았고, 어린이날에 상을 받을 아이로 영심이를 추천하게까지 된다. 그 아이들 모두를 ‘불어 오는 바람에 피어난 진달래’로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임길택 선생님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동화집 <산골 마을 아이들>, <느릅골 아이들>에 실린 이야기들도 모두 실제 아이들을 모델로 한 동화들이다. 

그중에 그림책으로 다시 만든 <들꽃 아이>는 글도 그림도 특히 아름답다. 김동성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 그림책 <들꽃 아이>는 주인공 아이가 환하고 밝아서 참 좋다. 별 뜨는 밤까지 걸어걸어 아이의 집을 찾아가는 선생님 모습에 가슴 먹먹해진다.        



나도 광부가 되겠지   

 

임길택 선생님의 시도 좋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임길택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들 시도 정말 좋다. 그 선생님에 그 아이들이랄까. 임길택 선생님이 가르친 탄광 마을 아이들 시를 엮은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에 실린 몇 편을 보자.     



아버지가 오실 때     


5학년 하대원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는 

쓰껌헌 탄가루로

화장을 하고 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장난말로

아버지 얼굴 예쁘네요.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이

그럼 예쁘다말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

한바탕 웃는다.   

      


아버지 월급    


6학년 정재욱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

아버지 월급 쓸 것도 없네.   

     


딱지 따먹기    


4학년 강원식    


딱지 따먹기를 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다닥다닥 붙은 집   

 

6학년 심선이

   

맘놓고 놀 수가 없어요.

시끄럽다는 소리가 

더 시끄러워요.    



밤에 일하고 들어와 잠을 자는 아버지들 때문에 맘놓고 골목에서 뛰어놀지도 못했던 아이들도 안타깝고, 그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도 안타깝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란다.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자란다. 탄가루를 뒤집어쓴 아빠 얼굴을 예쁘다고 할 줄 아는 아이로, 딱지에게조차 마음 깃들이는 맑은 아이로, 아버지의 얇은 월급봉투를 걱정하면서도 광부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는 아이로, 그렇게 하루하루 자라고 또 자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임길택 선생님이 가르친 산골 마을 아이들 시를 엮은 <꼴찌도 상이 많아야 한다>에 담긴 시들 역시 명작들이다.         



가을비    

    

5학년 김형영  

  

머가 못마땅하여

이 바쁜 가을철에

비만 뿌리나.  

   

가을비야 그만 오렴.

우리 엄마 고추 따고

우리 식구 모여서 벼 베게

가을비야 가을비야

그만 오렴.   

      


고추 따기    


6학년 윤희순    


빨갛게 익은

고추 사이로 다니며

빨간 고추를 딴다.     


한 골을 다 따고

나와 보면

아직도 몇 골이 남았는지 

알 수가 없다.     

두 골 다고 세 골을 따도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만큼 땄는데도

허리는 아파 죽겠는데

저 많은 것을 

오늘 다 따야 하니

한숨만 나온다.    

 



이오덕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들의 시를 엮은 <일하는 아이들>의 또다른 판본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일하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깨끗하게 담았고, 당당한 한몫을 해내는 건강한 일꾼의 모습도 보인다. 임길택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들은 이렇게 자기 마음을 글에 녹여내면서 상처를 보듬고, 친구들의 삶을 이해하고, 또 세상을 깨달았다.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는데 꼴찌를 한 아이에게 더 많은 상을 안겨 주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선생님이라면 이사를 가서라도 우리 아이가 배워 보게 하고 싶다, 생각했던 선생님이 두 분 있다. 한 분은  강원도의 탁동철 선생님. 돌아가신 임길택 선생님을 아주 많이 닮은 분이다. 실제로 탁동철 선생님 학교에는 서울에서 온 교환 학생이 꽤 여럿 있었던 것으로 안다. 임길택 선생님처럼 해마다 아이들의 문집을 엮고 계시고, 스스로 시와 산문을 열심히 쓰신다. 

또 한 분은 부산의 홍정욱 선생님. <꼭꼭 씹으면 뭐든지 달다>를 쓰셨다. 아이들에게 감을 깎고 곶감 매다는 일을 하게 하고, 비가 오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웅덩이에 발을 담그게 하는 분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또다른 모습의 임길택 선생님이 끊임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위안이다.


임길택 선생님이 묻힌 태백산 언저리에는 임길택 선생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이 새겨져 있다. 아프게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마음을 고운 시어로 어루만지고 싶었던 선생의 뜻이 잘 드러나는 시라서 시비에 새겼다 했다. 임길택 선생님의 뜻을 이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딸 임울밑이 그 시비를 한없이 쓰다듬던 장면, 새삼 떠오른다.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    


빗물에 패인 자국 따라

까만 물 흐르는 길을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골목길 돌고 돌아 산과 맞닿는 곳

앉은뱅이 두 칸 방 우리 집까지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한밤중, 

라면 두 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 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   

      


* 어린이책 함께 읽는 모임 하나 새롭게 시작하기 전날, 가난과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들로 키웠던 임길택 선생님 생각하며 썼던 글 생각나서 올린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린이책 출판을 시작했는지 잊지 않으려 한다. 언제나 정답은 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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