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정리하는 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바닥에 발 디딜 곳이 없어지는 건 시간 문제인 상태.
더이상 보지 않는 책들 중에서 후배들이 보아도 좋을 책을 몇 권 골랐다. 더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책들 사이에서 채 지우지 못한 밑줄과 미련을 함께 버린다. 분명히 그 책을 샀는데 어디 갔지? 하는 소리를 어느 날엔가는 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서재에 빈틈이 생겼으니 그것만 기뻐하자.
후배가 책을 가지러 오면서 아이랑 하면 좋겠다며 <코코너츠>라는 보드게임을 가져왔다.
앞으로 팔을 쭉 내밀고 있는 원숭이 손바닥에 코코넛 알갱이 한 개를 올리고 튕겨서 컵에 집어넣는 단순한 게임이다.
힘을 조금 더 주고 덜 주는 게 쉬운 일일 것 같았는데 막상 해 보니 맘대로 안 된다. 난데없는 방향으로만 날아가는 코코넛 열매를 어, 어, 하면서 쳐다만 보는 나를 아이가 어이없어 한다.
이제 갓 여덟 살이 된 아이는 엄마가 자기보다 잘해 내긴 글렀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아량을 베풀고 여유를 부린다.
“괜찮아. 연습하면 잘 될 거야.”
원숭이 손에 올린 코코넛 열매를 컵에 골인시키는 걸 연습해서 어디에 쓸까 싶지만, 몰두하는 아이를 보며 조금 더 열중해 본다.
저녁으로 수육을 삶고,
김치냉장고에서 잘 익어 신선한 냄새를 풍기는 아삭한 김치와 밥을 먹었다.
아이는 밥을 먹으면서 연신 손오공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채고, 남편은 오늘은 선잠 자지 않고 제대로 깊은 잠을 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루 세 끼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다섯 번쯤 한다.
중간중간 먹는 아이 간식, 휴일엔 남편과 내가 마시는 차, 수시로 나오는 물컵들까지. 식기 세척기 덕분에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다가온다.
“우리도 식기 세척기 살까?”
아니, 안 되지. 서재에서 책 몇 권 겨우 비워 놓고 또 뭔가를 살 궁리를 하고 있네. 조금 더 살아 보자. 절실해지면 그때 또 생각해 보자.
저녁을 먹고 김이듬의 에세이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를 다시 들고 앉는다. 시인의 산문은 길이에 상관없이 모두 시처럼 읽힌다. 절반쯤 읽는 동안 그 절반의 절반쯤은 밑줄을 긋거나 다시 보려고 접어 두거나, 한귀퉁이에 메모를 해 두었다. 생각을 비집고 들어오는 밀도가 놀라운 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시인의 절망과 희망과 기쁨과 그리움의 결정들을 이렇게 엿보아도 괜찮을 것일까, 조심스러워진다. 이깟 넋두리는 니 일기장에나 하라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 에세이가 한둘이었던가. 간만에 홀로 깨어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을 만났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아이가 읽어 주는 그림책을 같이 들여다보고, 아이를 재운 뒤 불을 끄고 거실로 나가 남편과 잠깐 이야기.
그리고 지금.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 소중한 하루,
여여한 일상에 감사하는 시간,
다음의 어느 날들도 오늘과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