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봤나 싶었다. 인터넷으로 채소 가격을 쳐 보다가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애호박 한 개가 무려 4,990원이란다.(20일 저녁 10시 현재, 홈플러스) 긴 장마 끝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다. 한살림 매장도, 생협 매장도 마찬가지다. 채소 선반은 아예 텅텅 비었다. 먹는 사람들이야 그저 한두 끼, 건너뛰면 그만이라지만 농부들은 어쩌나 싶었다. 찾아보니, 농부가 주인공인 그림책이 꽤 있다.
농부는 땅을 알고, 때를 잘 아는 사람이야.
내가 바로 농부란다.
이윤엽의 그림책 <나는 농부란다>는 어린이에게 직업의 세계를 소개하는 “일과사람” 시리즈의 한 권이다. 농부가 어떤 일을 하는지, 한 해를 어떻게 보내는지 알려주는 논픽션 그림책인데 어쩌자고 이윤엽 작가의 이 그림책은 한 편의 시처럼 읽히는 걸까. 처음 봤을 땐 1980년대 한창 집회 현장을 휩쓸었던 민중 판화가 지금 통할까? 싶어 우려스러웠는데,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벼를 돌보는 농부의 모습을 담은 장면에서 설득되고 말았다. 아, 이 이야기라면 판화가 아니면 안 되었겠다, 하고.
지금 아이들은 평생 살면서 농부를 단 한 번도 못 만나 볼 수도 있을 거다. 농부들이 거둔 먹을거리로 밥상을 채우면서도 한 번도 그이들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로 살다가 도시로 나온 이농민이다. 내 사촌오빠는 지금도 시골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다. 그런데도 내 아이에게 ‘농사’ ‘농부’라는 말은 멀기만 하다. 얼마나 어렵게 농사가 이루어지는지, 그 열매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몸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다.
김윤이의 그림책 <밀짚모자>가 어느 정도는 그 갈증을 해소시켜 준다.
아직 여린 옥수수가
비바람에도 끄떡없게, 단단히 자리 잡도록
밀짚모자 둘이서
하루도 빠짐없이 정성껏 돌봅니다.
옥수수가 자라는 동안 맘 졸이고 애쓰는 두 농부의 모습을 ‘밀짚모자’로 치환시켜 들려준다.
그림도 시원스럽다. 두 밀짚모자의 보살핌으로 자라난 옥수수는 사랑스럽고 정겹다. 방학마다 외갓집에서 외할머니가 수염 벗겨 삶아 주던 그 맛나고 고소한 옥수수가 저절로 소환되는 그림책이다. 실제로 올 여름, 장마 시작 전에 옥수수를 몇 번이나 삶아 먹는 동안, 이 그림책은 늘 식탁 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만, 벼가 한창 자랄 때 비가 없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많이 힘들다. 전미화의 그림채 <물싸움>에는 가뭄 때문에 힘겨워하는 농부들 이야기가 실감나게 담겨 있다.
물싸움이 시작됐다.
남의 논에 들어가는 물을 막고 자기 논에 물꼬를 튼다.
눈에 불을 켜고 자기 논을 지킨다.
며칠째 잠을 잘 수 없다.
그렇게 커져 가던 갈등은 늙은 농부의 “팻물!” 외침에 수그러든다. 팻물이란 농부들이 서로 합의해 수로인 ‘보’에서 가장 먼 논부터 차례로 물을 대자는 약속을 말한다. 이 팻물을 행하면 더 큰 물싸움을 막고 사람과 논을 살릴 수 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난생 처음 듣는 말, 팻물. 한정된 자원을 골고루 나눠 쓰되, 가장 먼 논에서부터 물을 대자는 평등한 약속. 아름다웠다. 필요에 의해 생겨난 약속이지만 농부들의 고민과 지혜가 돋보이는 멋진 약속이다. 짐승의 마음이 앞서 달릴 때, ‘팻물’을 소리 높여 외치는 어른이 우리 주변에 꼭 있었으면 좋겠다. 뉴스를 보면 답답해지는 마음을 그림책으로 씻는다.
밤코의 그림책 <모모모모모>는 유쾌하다. 작정하고 심플하게 만든 이야기. 농사 이야기를 이렇게도 풀어갈 수 있구나, 싶어 신기하다. 텍스트를 그림처럼 활용하는 방식도 놀랍고, 모내기부터 시작해 차츰 익어가는 벼의 일대기를 글자 몇 개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빼어나다. 글도 그림도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책 <새 보는 할배>와 함께 놓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담백하고 맹맹한 느낌으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제격이다. 늙은 농부 할아버지의 헐헐한 웃음에 단단히 위로받는다.
장마 뒤 폭염이 한창이라는 8월의 들녘에서, 농부님들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그것이 채소값 얼마, 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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