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아이와 함께 북스테이
* 지금은 8살이 된 아이와 함께 다녀온 북스테이 기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다 보니, 지난 시절 책방과 맺은 이런저런 인연들도 떠올라 쓰고 싶은 글이 많아졌어요. 일주일에 한두 편씩 올려 볼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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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우애와 환대가 머무는 시간과 공간, 북스테이
겨울이었다. 시린 바람이 출판단지를 휘몰아 지나가고, 잔뜩 움츠린 우리들은 인적 없는 출판단지의 밤길을 이리저리 산책했다. 기묘한 정적이었다. 낮 동안 출판사 직원들이 이리저리 편집하던 책의 글자들이 죄 몰려나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혜의숲>에 돌아오니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녹았다. 책으로 가득한 <지혜의숲>은 늦은 밤에도, 새벽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르락사르락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가끔 들릴 뿐이었다. 책으로 가득한 <지혜의숲> 2층, “지지향”에서 보내는 하룻밤, 그것이 내 인생 첫 번째 북스테이였다.
<지혜의숲>에 새벽까지 책을 읽고, 노트북을 두들기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누군가는 그곳을 “목을 죄듯 마감이 임박한 원고를 밤새 쓸 작정”(김이듬)으로 찾는다 했고, 누군가는 우리들처럼 그곳에서 책 이야기를 밤새 나눌 셈으로 찾기도 한다 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책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 있는 풍경은, 어쩌자고 내게 그렇게 아늑해 보였는지. 나중에, 내 아이가 크면 아이와 함께 그렇게 책이 넘쳐나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다. 책이 가만히 걸어오는 말에 화답하며 하루를 보내고 나면, 아이도 나도 마음이 그득해질 것 같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책의 향에 취할 수 있고, 책장과 책장 사이를 건너는 동안 그 책방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훔쳐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개 책방은 겨울에 끔찍할 정도로 춥다. 책방은 창밖에서 안이 잘 보여야 하는데 안이 너무 따뜻하면 창에 김이 서려 안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에서는 세상 어느 것보다 더 많고 지저분한 먼지가 뿜어져 나오고 서가에 꽂힌 책의 윗부분은 늘 금파리가 죽을 장소로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책 대 담배, 53)
조지 오웰은 헌책방에서 일하게 되면서 책방 주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아졌다고 썼지만, 어쩐지 아픈 사람에게 골라 줄 책을 사러 오거나 제목도 지은이도 잊었지만 표지가 빨간색이었던 책을 찾아 달라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손님들 사이에 서 있는 조지 오웰의 모습은 왠지 퍽 잘 어울린다. 목사가 되라는 성화를 못 이겨 신학대학에 입학했으나 결국 자살을 시도하고 만 헤르만 헤세가 작가의 꿈을 키워 간 곳도 책방이었다. 내가 우연히 들른 어느 책방에서 미래의 조지 오웰이나 헤르만 헤세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우연히 그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어느 위대한 소설의 바탕이 된다거나 작은 에피소드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와, 세상에!!
그렇게 낯선 책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우리가 우연히 맞닥뜨릴 풍경들이 일상과 많이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방에서 보내는 하룻밤 기억이 조용하고 고즈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사건들로 풍성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도시가 아닌 곳에 있는 책방이면 좋겠다 싶었다. 책과 함께 영혼이 배부른 밤을 보내고 나면 가까운 맛집에 들러 육신의 허기까지 기껍게 채울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책뿐 아니라 아이라 아이가 사랑하는 동물들이 같이 있는 풍경이면 좋겠다 싶었다.
지도를 펼쳐 놓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날들이 참으로 즐거웠다.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 덕분에!
그러나 언제나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 법이다. 생각지도 못한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아이와 나는 꼼짝없이 집에 붙잡혀 있는 신세가 됐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갔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도 삶은 이어져야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의 지혜를 빌려, 하루에 손님 딱 한 팀만 받는 북스테이 책방으로 조심조심 여행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됐다.(괴산의 <숲속작은책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코로나19와 함께한 여행이었다.) 방역 단계를 고려해야 했고, 이동 시간도 생각해야 했다. 너무 먼 곳으로 가기는 힘들어진 시대였고, 사람 많은 곳은 피해야 했다. 일곱 살 아이가 함께하는 여행이니 책방의 물리적인 안전성도 살펴야 했다. 이런저런 조건이 맞아도 손님 1인만 받는다는 책방도 있고, “노 키즈”를 이야기하는 책방도 있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책방에서 아이는 안 된다(물론 아이 안전을 고려한 결정이겠지만)는 대답을 듣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1부에 실은 이야기들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환대해 준 곳들이다. 내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해 주었던 시골 외갓집의 추억을 내 아이에게는 줄 수 없어서 많이 미안했는데, 시골 마을에 아담하게 자리한 책방들은 아이의 시골집이 되어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본 적 없는 아이를 손주처럼, 조카처럼 반겨 준 책방지기님들에게 새삼 감사한다. 아이는 낯선 곳에서도 신나게 뛰어다녔고, 책방에서 만난 고양이와 강아지들에게 한눈에 반했으며 지나는 바람에게도 인사하며 멋진 시간을 보냈다.
2부에는 하룻밤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책방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아이 덕분에 동네 책방이 더 절실해졌고, 내가 가고 싶은 책방의 모습도 점점 구체화되었다. 그 책방들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도 지나간 어느 순간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지녔으면 좋겠다.
책방 숫자가 2천 개가 넘는다 하고(2020년 기준, 한국서점편람), 동네 책방은 5백 곳이 넘는다 한다(2019년 기준, 퍼니플랜). 문을 닫고 지내다시피 했던 2020년 한 해 동안 그곳들이 어떻게 어려움을 견뎌 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동네 책방이 어떻게 해야 수입을 늘리고, 몇 년에 한 번씩 새로 이야기해야 하는 도서정가제 유지를 위한 대책이나 책방의 전문 큐레이션 이야기 같은 건 하지 못한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의 독자로 책방에 갔고, 내가 갔던 그 책방들이 내 아이가 어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의 호주머니와 가방 안에 휴대전화가 있듯이 책 한 권이 들어 있으면 좋겠다. 동네 책방에 와서 책 한 권 고르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책방지기 김이듬 시인은 말한다. 내 마음이 딱 그렇다. 동네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일이 일상이 되고, 책과 함께 보내는 하룻밤이 누구나 꼭 해고픈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하룻밤 머물고 싶은 북스테이 책방이 너무도 많다. <남해의봄날> 덕분에 통영이 더 좋아졌고, 언젠가 섬진강 <도깨비마을>에도 꼭 가 보고 싶다. 아이와 함께 언제고 찾아갈 수 있는 그림책 마을을 꿈꾸고, 아이가 먼저 “엄마, 또 언제 책방에 자러 가?” 묻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내가 머문 모든 곳들이 오늘도, 내일도 사랑받고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 담아, 글을 시작한다.
1부 책과 함께 하룻밤
시를 쓰게 만드는 책방
_ 책방 <생각을담는집>의 백 가지 매력
그 섬에 자꾸만 가고 싶어지는 까닭
_ 강화 책방 <시점>에서 보낸 하룻밤 이야기
그곳에 서점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_ 괴산 <숲속작은책방>에서 보낸 동화 같은 하룻밤
세상 끝에서 만나고 싶은 책방이 있다면
_ 책방 <국자와주걱>에서 보낸 꼽꼽한 시간들
온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곳, 도서관
_ <바람숲그림책도서관> 북스테이
2부 그곳에 책방이 있어서
당신이 간 그곳이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기를
그곳에 책방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해 5월, 제주의 책방들
내 지난 시절의 책방
어쩌다 책방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는 책방
도서관이 가까운 동네에서 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