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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l 15. 2021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는 책방

 요즘도 가끔 대형 서점에 책을 사러 간다. 모임에 보여 줄 책이 있는데, 깜빡 동네 책방에 주문을 하지 못했을 때 교보문고 재고를 검색해 보고 가는 것이다. 그런 때가 아니면 책을 사러 교보문고에 가는 일은 거의 없다. 문구를 사러 갈 때는 있지만. 


이렇게 된 것은 어린이책 코너가 망가진 이후인 것 같다. 제법 괜찮은 신간들이 진열되고 아이들에게 권해 주고 싶은 책이 진열되는 때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아이가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된 뒤,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아무거나 골라 봐.”라는 말을 하기 꺼려지는 곳이 되고 말았다. 광화문은 물론이고, 내가 사는 고양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베스트셀러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는 것은 나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잘 팔리는 책이라고 해도, 잘 팔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배치하는 것이 괜찮은지, 하는 문제의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어린이 독자들이 좋은 책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큐레이션 앞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곤 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책방에 갈 때는 반드시 동네 책방을 찾는다. <행복한책방>도 좋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가깝고 아이가 사랑하는 <알모책방>에 더 자주 가게 된다. 책방 가는 일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꽤 좋은 선물이 아닐까 한다.      


“엄마, 알모에 또 언제 가?”


코로나19로 책방 문을 여는 것도 들쑥날쑥, 아이가 함께하는 “이야기숲”  모임도 열지 못하게 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는 묻는다. “이야기숲”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 <알모책방>에 선생님이 오셔서 그림책도 같이 보고, 가끔은 정발산에도 오른다. 지하를 온통 뛰어다니면서 신나게 두 시간을 보내고 올라오는 아이들 얼굴에선 행복한 기운이 마구 번져나온다. “아, 잘 놀았다!” 하는 기분 좋은 표정이다. 엄마랑 놀 때는 보기 힘든 얼굴. 그래서 늘 고마워지는 시간이다. 


“이야기숲” 모임을 하면서도 자주 가게 됐지만 그전에 나는 <알모책방>에서 어린이책 속 캐릭터들을 인형으로 만드는 “꼬맹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이곳이 더 살뜰한 사랑방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림책 주인공들을 인형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놀라운 사람들을 그저 경이로운 눈으로 보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한 땀 한 땀 그분들을 따라 『팥빙수의 전설』에 나오는 눈호랑이와 할머니를, 『파란 오리』에 나오는 엄마 오리를, 『나오니까 좋다』에 나오는 릴라를, 『파랑이 싫어!』의 사자를, 『밤의 이야기』에 나오는 밤 할머니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림책 『엄마 마중』에 딸려 나왔던 인형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아이를 지켜 주고 있는데, 아이의 애착 인형 ‘마중이’를 새로 하나 만들어 주고 싶어 그림책 인형 만들기에 도전하게 됐다. 그러나 사실 그건 뒷전이고 결국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되었다. 아이는 지금도 호시탐탐 엄마의 인형을 노린다. 인형을 안고 그림책을 읽는 순간을 즐긴다. 이 또한 <알모책방>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이 작은 동네 책방은 우리 아이가 지난 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어떤 책을 읽으면 좋아할지 알고 있다. 엄마인 내게 도움이 될 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내가 좋아할 만한 그림책 신간이 나오면 신나서 보여 준다. 그런 온도의 작은 책방은 온갖 책을 다 갖추고 있긴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큰 책방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내가 마음을 줄 수 있는 책방은 문을 여는 순간부터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는 그런 책방일 수밖에 없다.      


“나는 책보다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화 이후 자동차와 네트워크에 의존하면서 어린이들이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이들이 문자화된 언어를 배우기 전에 흙과 바람, 태양의 빛과 소리, 자연의 색 이런 것들을 오감으로 먼저 익혀야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걸 느껴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림책 마을은 어린이들에게 잃어버린 마음과 생명의 소리를 다시 찾아주고 싶어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이 어린이만 보는 것이 아니듯, 그림책마을 역시 어른들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다시 찾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245)     


일본의 <키조 그림책 마을> 쿠로키 선생의 말이다. 아이들이 잃어버린 마음과 생명의 소리를 찾아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고 해도, 막상 도시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아이에게는 <알모책방>이 있고, “이야기숲” 모임이 있어서 계절을 누릴 수 있다. 너른 창 바깥으로 변해 가는 나무와 풀의 색깔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실감하고 가까운 정발산과 호수공원 나들이로 모자란 생태 감수성을 채워 넣는다. 


우리는 책방에서 단지 책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책을 함께 읽은 사람들과의 시간을 사는 것이고, 함께 나눈 경험을 사는 것인가 하면, 앞으로 어떤 시간들을 보내고 싶은지 같은 꿈을 함께 사게 된다. 동네 책방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동네 책방이어서만 가능한 일이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초콜릿 사탕이 매달리는 트리에서 하나씩 사탕 빼 먹는 재미로 들르던 책방이 이제 아이에게 친구 집만큼이나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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