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탄 기차 세 칸 너머에 있다고 했다. 서행을 하던 ktx가 연착되고 있다는 안내가 나오자마자 저 혼자 널뛰기를 시작한 심장은 자낙스를 털어넣어도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누구라도 나 좀, 하는 심정으로 누른 전화기 너머에서 너는 말했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거짓말처럼 나타난 너를 안고 울었다. 이제 살았어. 너의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면서 생각했지. 정말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야.
더 이상 서행하는 기차 어디쯤에서 비상벨을 눌러 저 열차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나 안심됐는지 너는 알까. 죽을 것 같아서 역무원을 붙들고 도와달란 말을 언제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다니. 이렇게 기적처럼.
경산역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온갖 얘기를 늘어놓았고. “너는 진짜 인물 따졌어.” 하는 소리에 낄낄대면서 한석규가 이상형이던 나의 이십 대의 어디메쯤에서 한참을 머물렀지.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의 아버지가 암환자가 되고, 너의 어머니 목소리에 깃든 독기가 빠지고, 나의 어머니가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세월을 주고받다 차창 밖 밤을 가르는 기차 불빛을 함께 건너다보며 순간 입을 다무는 찰나조차 꿈결 같던 그날의 하행선.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 주느라 몇 번쯤 마주잡은 손을 놓았던 시간 말고 내내 너는 내 심장을 붙들고 심폐소생술 중이었단 걸 너는 모르지. 너만 모르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뻗어 가다 결국은 호흡곤란으로 쓰러지고 마는, 참으로 고약한 공황장애. 그날 기차에서 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르는, 나만 아는 나만의 응급 상황. 겪지 않은 이들은 심신이 약해서 그런다 쉽게 말하는. 그러나 아는 이들은 꼭 안아 주며 등 쓸어 주는 그런.
그날 너는 나의 기적이었고, 행운의 현재진행형이었고, 밤의 정갈한 가르마였다. 고맙단 말을 이렇게 길게 써 보는 마음, 너는 알겠지.
2023년 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