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푸스 10년이면 농담을 읊는다.

by 스몰플레져

이 정도의 수치라면 원래는 3개월에 한 번쯤 가야 하는 외래이지만 5주 간격으로 맞고 있는 주사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주기에 맞춰 외래를 가고 있다. 대학병원 진료라는 게 사실은 굉장히 형식적으로 검사 결과 확인 후 약 처방 하면서 몇 마디 나누는 게 전부인데, 심지어 5주마다 계속 만나는 환자의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피검사 수치를 가지고 교수가 나에게 할 말이 뭐 얼마나 더 있겠나 싶다.


"요즘 식도는 좀 어때요?"


식도는 소화기내과에서 살피는 부분이긴 하지만 류마티스내과 교수님이 물었다.


"네? 뭐.. 괜찮죠."

그런데 대답하고 생각해 보니 보이지도 않는 식도가 괜찮은지를 내가 알 수가 있나. 식도가 터지기 전에 전조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속에서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식도가 터졌다는 사실은 피를 뱉거나 혈변을 보거나 백지장처럼 핏기 없는 얼굴과 입술색, 혹은 산소가 부족해 쓰러지는 등의 과정을 거쳐야만 알 수 있던 것이기에 현재 내 안에서 식도가 건강하게 제 할 일을 잘하고 있는 중인지, 아님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드릉드릉 준비하는 중인지는 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식도는 터져봐야 아는 건데 안 터졌으니까 괜찮겠죠?"


이어지는 짧은 침묵 에 빵 터진 교수님의 웃음소리.


"아니, 그걸 그렇게 덤덤하게 이야기하시면... 허허... 그게 되게 좋은 태도인 건 맞는데..."


"안 죽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살아야지 뭐 어쩌겠어요."


"아니, 그게 다 맞는 말이긴 한데... 허허..."


웃기긴 하는데 마음껏 웃을 수 없어서 금세 헛웃음으로 마무리하시던 교수님과 나도 함께 웃었다. 평소 병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스테이블하다는 이유로 칭찬받았던 모범환자는 오전 내내 이어진 진료로 지루했을 교수님에게 웃음을 드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평생 가지고 가야 하는데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병이라 일희는 해도 일비는 하지 말자는 게 병을 마주하는 나의 태도이다. 물론 일비를 아예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병에 3번의 기적과 7번의 좌절이 있다면 3번 기뻐하고 좌절 6번은 덤덤하게 내가 환자인 걸 잊고 사는 듯이 지나가고 1번만 슬퍼하는 것. 무심하게 병을 대하는 게 10년 넘는 환자의 신분으로도 남들처럼 평범한 듯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환자가 아니라고 해도 산다는 건 다 같은 거 아닐까? 나이 들수록 사는 게 별 거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것. 별일 없고 심심한 하루도, 힘들어 다 놓고 싶은 하루마저도 차곡차곡 잘 쌓아서 지금 내가 오늘을 살고 있는 것.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sns에서 보이는 모습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한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누구에게나 힘들고 슬픈 일은 있다. 어려움이라는 게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경중의 차이가 있긴 하더라도, 주관적인 감정의 크기는 타인이 재단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이 들수록 섣부른 위로를 아끼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나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 종종 그러한 삼켜진 위로를 느낀다. 차마 정말 괜찮냐고, 하루하루가 무섭지 않냐고 묻지 못하고 평범한 대화만을 건네는 그들의 말에 나도 마음으로 대답한다.

다 지나간다고. 살다 보면 또 아무렇지 않아 지는 날이 온다고. 그러니 괜찮은 척하고 있는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잘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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