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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May 06. 2019

동경, 불안정한 떠돌이의 성인 찾기

파란만장 감정지도

동경(憧憬) 
1.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2.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


90년대 한국은 인도 여행 붐이 일어났다.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 대박을 치고, 각 출판사마다 인도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너도나도 환상을 품고 한국 단체여행객들이 인도로 몰려들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한국 여행자들은 인도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다녔다. 


나도 성자의 나라 인도로 갔다. 과연 책에서 보던 성자가 있을까?! 내 불안정한 마음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종교의 성지가 몰려있는 인도 북부지역을 떠돌아다녔다. 배낭여행 1년 차가 넘어 나의 행색은 거지꼴이었다. 자르지 않아 긴 머리와 수염은 인도 노숙자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편하게 다녔나 보다.


인도만큼 길거리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길에 앉아서 명상하는 수행자, 정장 차림의 회사원, 요가하는 사람, 삼지창을 들고 가는 시크교도, 하시시 하는 사두 그 옆을 지나가는 고급 승용차, 신석기와 과학문명을 동시간대에 볼 수 있었다. 굿이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곳보다 길거리 카페에 앉아 사람 구경이 더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가는 인도 여행을 권장하는 편은 아니다. 90년대에도 여행자 실종 전단지를 인도에서 가장 많이 봤다. 특히 동양인이 많았다. 물론 가장 재미있던 여행지 중 하나가 인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큰 사고 없이 다녔다고 그곳이 안전한 곳은 아니다. 여행자 사고를 가장 많이 들었던 곳이 인도였으니, 방심하면 큰일 나는 곳이 인도다.


한 지방을 떠돌던 중 어느 사원에 이름난 성자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성자가 있다는 작은 힌두교 사원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고, 넓은 기도실에 인도인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힌두교 신상들 앞 작은 철창문 안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긴 수염과 천으로 몸 전체를 휘감은 옷은 인도 성자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과 섞여 앉았다. 그 성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를 가리켰다. 모두들 나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낯선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했다. 설법을 하며 그 성자는 계속 관심 있게 지켜보더니, 내게 몸짓 손짓하며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나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악기를 가져왔다.


6,7명의 연주자들이 음악을 연주하자 사람들은 눈을 감고 리듬에 몸을 맡긴다. 나도 음악을 듣다 보니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해지고 리듬에 취해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에게 인도의 독특한 음악으로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것 같다. 그 성자가 왜 철창 안에서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영롱한 눈빛이 기억에 남았다. 



반면 길거리 사두를 만나보면 하시시(인도 대마초)를 피우며 수행자 행세를 하는 가짜들이 많았다. 한 서양 여자는 가짜 사두에 속아서 이용만 당하는 사례도 보았다. 간혹 인도에 온 한국 여행자들도 인도 특유의 문화에 휩쓸려 가짜 구도자처럼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진리를 찾는 선지자처럼 여행자를 유혹하고 조종하려 했다. 


둥그렇게 앉아 하시시를 피우며 경을 외우면서 설법을 하는 사이비도 있었다. 어린 배낭여행자들은 신비적 분위기에 휩쓸려 구원받은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여행은 자신의 윤리적 선을 무장해제하기 안성맞춤의 조건이다. 여기서 심각한 탈선이 시작되는데, 성자 행세하는 이들이 육체적인 관계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인도인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The Fall of Phaeton


그렇게 어린 나는 성자에 대한 동경이 서서히 무너지게 되었다. 신화의 환상이 깨지니 현실을 더 선명히 보였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어떤 것을 동경할수록 직접 눈으로 보고 깨지는 편이 더 낫다. 동경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이와 같은 과정을 계속 되풀이했다. 지혜와 조금도 상관없는 세상의 모순들을 직접 경험했다. 


오늘날 소위 동경하던 사람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자기가 상상했던 사람과의 불일치에 견디지 못하고 허상을 쫓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현대 시대 인터넷 지식 공유는 신비에 싸인 실체를 빠르게  드러내면서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것이 오히려 동경의 허울을 벗기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나는 삶의 불안정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동경하는 대상을 찾아 건너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길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결코 깨달은 성자가 모든 것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동경하는 대상에 온전히 맡기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어릴 때 누군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정상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이가 들어 여전히 동경의 대상에 속박되어 있다면 결코 내적 성숙을 체험하지 못한다. 동경하던 사람이 상상하던 사람이 아니라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 과정 속의 충격을 재해석하고 나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랬던 동경을 버린 안락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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