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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May 26. 2019

당황,  나체로 번지점프를 하다

파란만장 감정지도

첫 배낭여행지 호주 케언즈에서 첫날 당황한 사건이 있었다. 때는 여행 자율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90년대,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나이 20대였다. 길거리에 선글라스 낀 백인들만 있는 거리가 생소했다. 어설픈 영어로 손짓 발짓하며 숙소를 잡고 곧바로 번지점프를 신청했다. 케언즈는 세계적인 레포츠 천국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버스를 타고 산 중턱에 자리한 번지점프대로 향했다.


이미 점프대에 여러 명의 백인들이 점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양인은 여자 한 명과 나뿐이었다. 올라갈 때 몰랐는데 위에서 아래를 보니 생각보다 너무 높았다. 대기줄이 점점 줄어들수록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뛰어내리는 백인들은 갖은 묘기를 부렸다. 물구나무서서 뛰고, 뒤로 보며 뛰고,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점프했다. 유일한 동양인 남자여서 자존심 때문에 내심 태연한 척했다.


케언즈 번지점프 출처 오스트레일리아 배낭


이제 내 앞에 두 명뿐이다. 그중 한 백인 여성이 안전요원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아래 속옷까지 다 벗어버린다. 갑자기 내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사실 실제 여자 누드를 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안전장치를 입고 점프대에 서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그녀를 응원했다. 나만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옷을 벗은 거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대낮에 여자가 옷을 다 벗고 번지점프를 하다니! 난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첫 문화 충격이 너무 세다. 내가 점프할 차례가 왔고 뛰어내렸다. 번지점프 수료증을 받고, 안내원에게 물어봤다.


“아까 여자분이 옷을 벗고 점프하던데 왜 그러냐?” “여자는 옷을 다 벗고 점프하면 공짜입니다. 남자는 하의만 벗어도 공짜고요.” 안내요원은 벽에 걸린 나체로 뛰어내리는 사진을 가리켰다. 나체로 번지 점프한 사진을 액자에 걸어놓은 것도 충격이다.


내가 옷을 벗고 번지 점프한 사진을 관광명소에 걸어놓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얼떨떨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이후 수많은 문화 차이 경험이 있지만, 이게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을 교과서에서 배우고 자란 세대여서 그럴까? 만약 우리나라에서 옷을 벗고 뛰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의 공교육으로 배운 지식은 내 상식이 되었고, 호주 첫날 무너졌다. 가끔 상식의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늘 듣던 말이 생각난다.



'넌 나이를 그렇게 처먹고 철이 없냐!' '상식적으로 좀 생각해라.' '순리대로 살아야지.'


어른들은 내 철없는 생각과 행동에 사회적 틀을 강요하고 어긋나지 않도록 교정했다. 나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고 그게 올바른 줄 알았다. 막상 해외 나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상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식이 아니었다. 그때 알았다. 상식이란 것은 인간이 정해놓은 틀이었구나. 여행을 하며 문화 차이로 여러 번 당황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충격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고정된 틀을 깬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주입식 교육을 받은 대로 한 상상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른들이 가르친 대로 살았다면 이런 글도 쓰지 못하지 않았을까.


멘붕이 오는 당황스러움은 내심 통쾌함을 느꼈다. 좋은 당황도 있구나, 규칙을 싫어했던 내 성격이 나쁘지 않은 거구나. 사회화로 만들어진 가면이 아닌, 진정한 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실제로 생각했던 세상의 모습과 다른 간극을 확인할 때 들었던 말은 철없는 놈이었다. “난 결혼해도 각방 쓰고 쓸 거야.” “집살 생각 없어.” “난 저축 안 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거야.” 10년 전에 이런 말을 하니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내가 그들을 당황시켰다. 결혼하면 합방은 당연하고, 부부는 집을 사기 위해 저축해야 하고, 세상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지 못한다.


지금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고 해결해야 할 일도 많다. 그러나 멋진 정장을 입고 외제차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부럽지가 않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알아가고 있고, 내적 성장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옷을 벗고 번지 점프한 여자가 보여준 예상 밖의 일이 성숙함으로 연결이 될 줄 나도 몰랐다. 당황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를 일깨우게 하는 감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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