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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May 10. 2020

하늘 위 유언서

인도네시아에서 태국행 비행기 기내/새벽 4시 business class


한참을 깊이 자다가 눈을 떴다. 심하게 기울어진 비행기 안 승객들은 좌석을 부여잡고 있다. 좌우로 흔들리는 기체. 이코노믹클래스 좌석 C3, 고정된 노트북 화면을 보며 빠른 손놀림으로 타이핑하는 사람, 정장을 입은 사람은 안경을 쓰고 좌석 옆 전화기를 집는다. 내 옆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급히 서두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무슨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떨리는 손) 띠띠띠띠~~

뚜뚜~뚜뚜~(통화 중 벨소리)

(쿵! 심하게 요동치자 움찔) 전화 좀 받아라! 망할 놈의 여편네야.


반복적으로 전화번호를 누르며, 노트북 화면에 계좌이체 엔터키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인다. 굳은 얼굴의 남자,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전화기:네, 감사합니다. 00 회사는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옆 남자:(급하게)야! 사모님 있재? 바꿔....

전화기:네?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전화기:(큰 소리로) 사장! 사장! 빨리 와이프 바꿔!!

옆 남자:네? 네!


(대기 신호음) 뚜~뚜~

쿵! 고도가 심하게 떨어진다. 수화물 칸에서 짐들이 쏟아져 내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옆 남자:윽! 왜 이리 안 받노.

아내:(차가운 음성)네, 벌써 도착했어요?

옆 남자:아니, 빨리 녹음 버튼 눌러.

아내:갑자기 녹음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옆 남자:아씨! 빨리~

아내:알았어요. 왜 화를 내고...(짜증 난 목소리) 눌렀어요.

옆 남자:지금부터 00 사장 유언이다. 앞으로 회사는 아들 00에게 사장을 물려줄 것이며...

아내:뭐라고? 갑자기 유언이 뭐야? 

옆 남자:조용히 해라. 좀! 아들에게 내 주식을.. 양도한다.

아내:주식이라니... 아니 무슨 일이야?

옆 남자:야이! 빌어먹을 여편네야? 지금 뱅기가 잘못돼 뿌따. 혹시 모르니까네...

아내:뭐? 정말?..............


‘쿠쿵~우두둑’ 기체가 아래위로 흔들리고 전화기를 놓칠 뻔하다가 꼭 부여잡니다.

‘우당탕 탕’ 기내식 카트가 통로에 부딪친 소리가 크게 났다.


갑작스러운 날씨로 비행기가 좌우로 요동쳤고, 옆 좌석 남자는 혹시나 모를 유언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옆 남자는 진심이었다. 나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유언이라는 것을 써보기로 했다. 우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막상 쓰려고 하니 남길 말이 짧다.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아는 사람도 몇 명 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사람 관계가 좁았던가?! 나는 이게 더 충격적이다. 


비행기 추락하는 두려움보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이 공포스러워졌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심각해졌다. 졸지에 하늘 위에서 유언서를 쓸 줄이야. 비행기는 안정을 찾고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다. 승객들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제 내 마음이 요동치고 폭풍이 몰려와 흔들어 재겼다. 승무원은 잠을 자지 않고 있는 나를 안심시킨다.



유언서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먼저 가게 되었어요. 최선을 다해서 키워주신 은혜도 못 갚고 힘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동생들아. 미안하다.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한다. 친구들아. 나와 친하게 지내주어서 고맙다. 먼저 가니 재밌게 살다 와라. 그런데 결혼 못해보고 가는 게 억울하다. 연애라도 실컷 해볼걸.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적힌 단어들은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말뿐이었다. 어쩌면 당연하지만 내용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남긴 결과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최소한 내가 걸어온 발자취라도 인터넷에 남기지 않았었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을 계기로 기록에 대한 중요함을 다시 알게 해 주었다. 몇 시간 동안 반페이지 남짓 유언을 작성하고 지쳐 잠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 유언서를 작성하면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글재주에 대한 재능도 기교도 없지만, 진심이 담긴 유언서를 작성하던 그 날의 기억은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멋진 문장과 절절한 감정표현으로 감동을 주는 글솜씨가 부럽지만, 투박하고 서투르지만 자기표현만 할 줄 안다면 시작해 볼 가치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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