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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Apr 02. 2019

공포, 내가 귀신에 끌리는 이유

파란만장 감정지도


갓난아이 때부터 시골 친할머니 집에 매년 몇 달씩 놀러 갔다.

서울에서 친할머니 집은 반나절이 걸리고, 차로 한참 산을 넘어야 했다.

집들도 몇 없는 그곳은 판타지 세계였다.

도시 아이가 생소한 자연의 신비로움을 체험한다는 것은 몸이 떨릴 정도로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지금 보다 많은 별빛과 여름철 반딧불이 온 동네를 밝히면, 우주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의 상상력은 여기가 시작점이기도 하다.


빛이 있다면 어둠이 있듯이 시골의 밤은 환희와 공포를 알게 해 주었다.

저녁에 앞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면, 산 중턱에 수많은 혼불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 마음에 저게 뭔지도 모르고, 신나 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일이라서,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사람이 죽으면 꼭 무덤을 쓰던 시대,  할머니 댁 앞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공동묘지 산이었다.

산에 여드름이 난 것처럼 보였다. 낮에 봐도 소름이 돋고는 했다.

가끔 어린애들이 귀신에 홀려 종종 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타지에서 온 어린애들이 1년에 한 명씩 저수지에 빠져 죽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내가 될 뻔했다.


겨울 낮, 심심해서 혼자 앞마당에 놀고 있었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새로 집 단장하신다고 바쁘셨다.

무심결에 나는 앞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마 이 시점에 의식이 멍해졌다. 귀신에 홀렸다고 말했다.

이때 산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나를 불렀다.

불현듯 저 산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집을 등지고 묘지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국도를 따라 무작정 걸어갔다.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족히 먼 거리였다.  

머릿속 의식은 목소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때까지 그리 무섭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이 없다.


어둑해질 무렵 논밭 옆에 꽁꽁 얼은 저수지가 보였다.

목소리는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거역할 수 없었다.

논밭에 물을 주기 위한 물웅덩이는 어린아이가 들어가면 위험한 높이였다.

얼어붙은 저수지 중앙을 향해 한 발짝씩 들어갔다. ‘짜자작’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의식이 되돌아왔다.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뒤로 엉거주춤 나와서, 저수지와 묘지산을 번갈아 보면서 상황 파악을 했다.  

순식간에 엄청난 공포심이 몰아쳤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할머니 집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절대 뒤돌아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망령이 내 뒤를 바짝 뒤쫓아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간담이 서늘할 만큼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다.

공포를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체험해야 했는지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달렸을까? 친할머니품으로 안기며 기절했다. 너무 놀라서 며칠간 앓아누웠다.

후일 어른들에게 들은 말은, 아이가 경기를 일으켜 여러 사람들이 나를 치료했다고 한다.

끔찍한 경험을 감당하기에는 5살 아이에게 너무 힘든 사건이었다.

내가 들어간 저수지는 매년 꼭 한 명씩 사람들이 빠져 죽는 곳이라고 들었다.

증명할 수 없는 경험은 증명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이 경험은 청소년 되어, 신의 존재와 종교적 물음으로 이어졌다.

청년이 되어, 여행을 다니며 각 나라 종교의 성지를 찾아가 보았다.

불교, 도교, 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자이나교, 티베트 불교 등 세계 곳곳을 기웃거려 보았다.

현실보다 내세를 탐독하며 위안을 삼으려는 자기 방어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세상이 싫어지면 영적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바보가 된다.






유년기의 경험한 공포는 내 무의식에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자존감이 낮으면, 세상을 무서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이 경험적 공포,

즉 두려움은 내 삶을 깊이 지배하게 되었다.

일하기 싫어서 골방에 앉아서 게임만 하게 된 것도,

미스터리, 음모론, 사후세계에 탐닉하며 탐욕스러운 세상을 탓한 것도,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며 내세관에 기대고 싶은 욕망도,

공포는 다양하게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의 공포는 이해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반대로 이해가 된다면 내면의 공포는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이 마귀든 천사든 상관없이, 내 안에 도사리는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위와 같이 어릴 적 경험한 공포는 의식 수준에 따라 잠식당하기도 하고,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두려울 때 감정의 문을 열고 공포를 대면했을 때, 정신이 환기가 되도록 마음의 문을 연다.

공포의 근원을 알아챘을 때, 공포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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