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가 뭔가 생각해 봤더니, 도대체 풀리지 않는 소설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소설을 한 10편은 완결지은 베테랑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한달전에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쓰다만 영화 시나리오 두개까지 합하면 세번째지만. (구상한 시나리오까지 다 끌어모은다면 한 다섯번째 쯤 되겠다. )
내용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일단 쓸때는 유치해도 쓰라는데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그 순간에는 세상에나 내게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다니 천재가 아닐까 싶은데, 한 10분만 지나고 한 문장만 쓰고나면 곡소리다. 아니, 이딴 유치한 글이나 쓰려고 내가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단 말이야. 원숭이도 너보단 낫겠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그 순간에는 급격하게 머리가 혼미해 지고 잠이 쏟아진다. 심장도 두근거린다. 내가 정녕 이걸 쓰고 싶은게 맞는지, 쓸수나 있는 인간인건지 뭔지 도저히 모르겠을 즈음에는 그냥 집을 뛰쳐 나가고 싶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걸 쓰기 시작한건지? 하기야, 나의 자신감은 어처구니 없는 곳에서 나오긴 했다. 나도 글은 되게 많은 지식과 소양이 있는 사람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최근 작가계에 쓰레기 같은 인성을 가진 작가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이상한 힘을 얻었다. 그러니까, 저런 범죄자들도 글을 쓰는데 내가 쓰지 못할 이유는 대체 뭐냐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일단 시작을 했으면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강외과 수술장에서 도망나온 전설의 인턴이다. 또 다른 병원에서 수련을 하다 잠적한 레지던트 1년차이기도 하다.... 도망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지만, 내가 영 끈기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일종의 컴플렉스로 자리잡아 내 속에 영원히 자리하게 되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수련을 다 마치고 치과의사를 때려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심리적인 타격은 컷다. 그러니 왠만하면 선택한 일을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게 정신건강에는 확실히 좋다. 나같이 소심한 인간은 특히나.
그러나 내가 원래 그렇게 끈기 없는 인간인가 생각해 보면, 나는 동기가 4명에서 나 혼자 줄어들때까지 꿋꿋하게 나 홀로 왕따였던 써클을 지키고 있었으며(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법고시 1차 합격후 좌절과 방황속에서도 어떻게든 결과를 내보겠다고 6년을 보냈다. 음, 그러니까 그렇게 끈기 없는 인간은 아니라는 거다. 생각해 보면 그만두는게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굉장히 쉽게 무슨일을 시도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뭐, 어때? 일단 해 보고 안되면 그만두지' 라는 태도가 내 머릿속에 기본으로 잠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학과 선택을 할때도, 자연계 인문계 선택을 할때도, 누군가를 사귈때도, 결혼할때도, 혹은 사법고시를 치고 코딩을 배우고, 해외 여행루트를 짤때도 항상 그랬다. 일단 앞으로 사귀는 건 모르겠고 뽀뽀부터 하고 보자라든가, 인도에서 파키스탄 비자까지 다 받아놓고는 영국으로 훌쩍 넘어가는 일 같은것이 그 예다. 그걸 40살이 넘은 이제야 알게 되다니?
가볍게 시도하고 아니다 싶으면 빨리 다른 것을 시도하라는 소리도, 한창 벤쳐 바람에 휩쓸려 읽었던 책에서 늘상 나오던 소리다. 생각해 보면 나는 좀더 빨리 그만둬야 했던 일을 괜히 남들 눈치보느라, 혹은 왠지 끝까지 해야만 할것 같아서 버둥대다가 뒤늦게서야 그만두곤 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시간에 자책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타고나기는 이미 시대에 걸맞는 인재였는데 마인드만 구시대적 인간이었다. 그만뒀으면 "안녕!" 하고 가볍게 인사한 뒤 다시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을. 어차피 여행이나 인생이나, 목적지 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걸어가는 것 아닌가.
그럼 언제가 과연 적당한 시기인가. 어차피 그만둘지 아닐지의 선택을 끝까지 미뤄봐도 결국에는 내 몸이 알아차린다. 아무리 끝까지 노력을 하려고 애써도 밤에 누우면 천정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고, 이렇게 살아 무엇하나 싶고, 식욕이 떨어져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거나 혹은 미친듯이 살이 찐다면 그때는 그냥 도망치라는 온 몸의 신호다. 지금 생각해 봐도 사법고시를 10년 더 공부했다고 붙었을리가 없고, 인턴을 도망나와 떠났던 여행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사실 그렇게 되기 전에 좀더 빨리 그만 뒀으면 좋았을 것 같지만.
그래서 이번 소설은 그만둘건가? 아니, 이번엔 정말 끝을 볼 것 같다. 소설로 땡전 한 푼 못 벌고 아무도 내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혹은 이게 마지막 소설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지더라도. 아직은 글쓰는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부담없이,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내 몸이 당장 때려 치우라고 야단치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