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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Feb 10. 2023

프러포즈받고 잠수

동거부터 할게요 2화



프러포즈를 받고 울었다는 친구들이 한 무리다. 깜짝 파티, 선물에다가 감동적인 손편지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한국에선 결혼 날짜까지 잡아두고 프러포즈를 하는 경우가 많은 데도 그렇다. 이미 다 알고 받는 건데 뭐가 그렇게 감동적일까 싶지만, 막상 프러포즈를 받아보면 감동적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프러포즈에 대한 로망이 있는 친구들도 많다. 친구 하나는 남자친구 프러포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울면서 "이런 식으론 결혼 못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친구는 어떤 식으로 프러포즈를 받고 싶은 지 1부터 10까지 꼼꼼히 남자친구를 가르치고, 미드 섹스 앤 더시티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가 신었던 마놀라 블라닉 구두로 직접 선물까지 골랐다.




"내가 너의 안전자산이 돼줄게"


남자친구와 숙소 마당에서 밤에 '불멍'을 하면서 와인 한잔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남자친구 생일을 맞아 둘이 경기도로 1박 2일 여행을 왔던 참이었다. 남자친구가 갑자기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얇은 종이포장을 꺼내더니 내게 건네줬다.


"이건 뭐야?"

"금이야."


"생뚱맞게 금은 왜?"

"네가 위험 투자를 많이 하잖아. 포트폴리오를 잘 만들려면 안전자산에도 투자해야지. 내가 인생에서 너의 안전자산이 돼줄게."


남자친구가 건네준 건 금 10돈이었다. 너무나도 남자친구스러운 프러포즈에 '풋'하고 웃음이 먼저 나왔다. 안전자산이라니. 당시 무서운 몰랐던 나는 여기저기에 불나방처럼 뛰어들 때였다. '듣보잡' 주식부터 더 듣보잡인 코인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였다. 슬슬 코로나 유동성으로 급등했던 자산가격이 제 자리를 찾으려 할 때라서 손해도 막심했다. 그런 내 무모함을 꼬집으면서 남자친구는 자신이 내 인생에서 '금' 같은 안전자산이 되겠다고 나선 거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깜짝 프러포즈였다. 본인 생일에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내가 "생일에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이 어딨냐"라고 물으니, 남자친구는 "생일이니까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라고 답했다. 우문현답이다.




남자친구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은 하나도 안 났다. 나는 보통 슬플 때 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결혼을 바라는 남자친구 마음을 몰랐던 건 아니었으나 이렇게 갑자기 프러포즈 공격을 할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생각해 볼게"라고 남자친구에게 말한 뒤 평소처럼 그날 밤을 보냈다.  


나는 프러포즈가 남자친구의 선전포고처럼 느껴졌다. 자기와 결혼하거나, 아니면 헤어져야 한다는 선전포고. 평소 결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나한테 프러포즈를 했으니, 남자친구도 배수진을 거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바로 추석 연휴가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남자친구한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 뒤 나는 잠수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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