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 같이 산 지 며칠 만에 5년 간의 긴 연애에서조차 알지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남자친구의 꼬리가 너무 길다는 것. 아침에 출근을 하고 나면 남자친구가 입었던 잠옷들이 부엌 탁자 의자에 널려있었다. 샤워를 하려고 옷을 걸어두었다가 그대로 두고 나간 흔적이다. 남자친구가 들어갔다 나온 방은 항상 불이 켜져있곤 했다.
뭐든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었다. 택배를 뜯으려 남자친구가 사용한 칼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실 어딘가를 굴러다녔다. 칼뿐만 아니라 손톱깎이, 돌돌이, 고양이 용품 등등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처음 한 달 동안 매일같이 남자친구의 길고도 긴 꼬리를 잡으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남자친구가 벗어둔 옷가지를 치우고, 환한 방의 불을 끄고, 물건들을 제자리에 갖다 놨다.
항상 1%가 부족한 점도 거슬렸다. 설거지를 한 뒤에는 음식찌꺼기가 묻은 싱크볼도 물로 헹구고, 주방 상판도 행주로 한 번 닦아야 되는 게 아닌가. 설거지에 차례대로 1단계부터 10단계까지의 일이 있다면 남자친구는 항상 8단계나 9단계에서 일을 멈췄다. 그럼 나머지 10단계 일은 꼭 내가 해야 했다.
매일같이 남자친구의 기다란 꼬리를 잡으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가 마무리해야 하는 게 싫었다. 남자 친구가 벗은 옷을 왜 내가 치워야 하지? 남자 친구가 쓴 물건을 왜 내가 제자리에 갖다 둬야 하지?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다고 성격상 지저분한 집을 그냥 두기도 어려워 결국 내가 움직였다. 잔소리를 하기 싫어서 한 두 번 참다가 남자친구한테 짜증을 확 내는 일이 잦아졌다. 같이 산 지 한 달 만에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졌다.
친한 선배한테 이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랬더니 선배가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 아내가 그래. 집에 들어오면 허물 벗듯이 옷을 벗고, 나갈 때도 그대로 옷을 벗어둔 채 나가거든. 신혼시절 한 번은 그걸 보고 너무 짜증이 나서 사진을 찍어서 출근한 아내한테 보냈어. 그랬더니 '이게 출근한 나한테까지 사진을 보내야 할 일이야?'라고 답장이 왔더라고. 그때 머리가 갑자기 '띵'했어. 생각해 보면 이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거든. 그 사람을 틀렸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해져."
담담하게 말하던 선배 이야기를 듣고 나도 깨달았다. 아,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면서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외치고 다니는 나지만 이 간단한 원리를 내 동거생활에 적용하는 법은 몰랐던 거다.
그날 이후 남자친구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자친구도 나 대신 많은 것을 해주고 있구나. 귀차니즘이 심한 나를 위해 항상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건 남자친구였다. 꽉 찼던 음식물 쓰레기통은 다음날이면 비어있었다. 밖에 나가서 버려야 하는 귀찮은 일이지만, 한 번도 생색을 내거나 한 적이 없어 잘 몰랐던 거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3개나 되는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는 것도 남자친구였다. 남자친구도 내가 하기 싫고, 귀찮아하는 일을 조용히 하고 있었다. 그게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타인이 서로에게 맞춰가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