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작가가 될 상인가?
내심 기대했다.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데 시야를 조금만 확장해도 잘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외인촌>이라는 시에서 김광균 작가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로 우리에게 공감각적 심상을 전했다. 청각의 시각화. 국어시험 단골 문제이기도 했다. 이런 공감각적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써내는 사람이 있다. 후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촉각을 시각화하는 사람. 1을 주제로 글을 쓰라고 하면 나는 1 다시 1이나 1 다시 2를 떠올리는데 2분의 2나 16 나누기 16을 머릿속에 떠 올리는 사람. 나는 일기에서 살짝만 앞으로 나간 이야기를 쓰는 건데, 관점이 전혀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 있어서 사실 좀 놀랐다. 묘사가 상세해서 글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을 그리듯이 장면이 탁 떠오른다. 이야기 형태의 글을 쓰는 감각을 지니고 있어 타고났나 싶기도 하다. 이건 글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원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마당에 서 있는 것이다. 난 그런 글쓰기를 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다.
내 마당은 한 평 남짓해서 그곳에서 가능한 작물을 꽉꽉 채워 심고 쥐어짜듯 수확하는데 잘 쓰는 사람은 유목민 같다. 경계를 허물고 여기저기에서 풀피리를 불며 식물을 키워낸다. 사용할 수 있는 토지가 넓다 보니 열매도 다양하고 튼실하다. 거칠지만 건강하고 단단해서 나라도 저 사람이 키운 걸 사 먹겠다 싶다. 무엇보다도 한 평에 갇혀 있는 나보다 행복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책을 꼭 쓰세요. 정말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넋을 놓고 남의 글을 보고 있다가 다시 내 글로 돌아온다. 나에게 집중한 글. 내 마음이 어떤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바라보는 글. 아직은 나에게서 벗어나기 어렵다. 여유가 없어 바깥 풍경이 어떤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잘 느끼지 못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자근자근 해체해 나가야 비로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속 깊이 새겨진 응어리를 발견하고 박힌 돌들을 잘 골라내야 한 평 밖에 안 되는 땅일지라도 잘 일궈낼 수 있으리라.
다른 사람의 글이 유려하고 좋아 보여도 그 글을 베낄 수는 있겠지만 흉내내기 어렵다. 그건 내 시선이 아니라서. 잠깐은 훔쳐 올 수 있어도 결국 내 것은 아니다.
나는 비교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발견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엄마가 친구와 나를 비교하는 것을 그리 끔찍이 싫어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저울에 올라간다. 내가 더 무거운지 남이 더 무거운지 비교하며 값어치를 매긴다. 누가 잘났는지 판단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도 남의 시선으로.
하지만 잘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가 아니다. 나와 남을 비교해서 잘난 척을 하기 위함도, 부러워하다 못해 질투를 느끼기 위함도 아니다. 내 글은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 어지러운 생각더미에서 오롯한 내 생각은 무엇인지 건져내기 위함이다.
내 생각을 건져내고 나면, 돌무더기인 마당에 키 작은 꽃도 심을 수 있겠지. 꽃씨를 가슴에 품고 나는 오늘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