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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듯 글을 쓴다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 방법

by 한걸음

뭔가 잘못되었다. 평소에도 나를 숨기는 데 익숙한데 표현하기 위해 시도하는 글에서마저 나를 지우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어투를 바꿔가며 글을 써 보고 있다. 일반적인 에세이 형식의 문장으로 쓰면 유려한 문장을 쓰고 싶어서 단어와 구조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며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릴 때가 많다. 무엇보다 글을 다 쓰고 나면 표현해야 할 내가 빠져있다.


그래서 대화체로, 일기체로 써 본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쓰니 고칠만한 문장이 많지 않고 나를 숨기기도 어렵다. 남 얘기가 아니라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려면 일단 이런 대화 형식이 맞겠구나.


글쓰기 수업에 가져갈 글을 어떤 걸 쓸까 고민하다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쓸까 친구에게 쓸까 했는데 생각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고 한문단 정도는 떠오르지만 A4 한 페이지를 채울 만큼 내용 구성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오빠 생각이 났다.


나는 오빠와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일에 가끔 얼굴을 볼 뿐 특별한 일 없이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평소에도 자주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빠와 남매 사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오빠 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나와 관심사가 비슷하지도 않고, 특히나 허세 가득한 오빠의 태도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어서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로서 동생인 나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으며 첫째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을 거슬러 생각해 보니 그랬다. 오빠도 나름대로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동안 헤아려보지 않았는데 글을 쓰려고 과거를 더듬다 보니 오빠의 마음에 조금은 가 닿았다.


집안에 큰일이 있으면 아빠 대신 엄마와 상의했던 오빠. 나보다 고작 세 살 많은 사람이 어른스러운 사고를 하고 결정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나는 오빠의 떨어지는 성적이나 고등학생인데 친구들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걸 비난하고 코웃음 칠 줄만 알았지 오빠가 가진 무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생각하다가 많이 울었다. 미안해서. 오빠는 첫째로서 감당해야 했던 것들에 대해 고되었다는 푸념이나, 내가 너 대신 이렇게 처리했으니 고맙게 생각하라는 공치사가 없었다. 그 많은 말들을 이고 지고 어떻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욕심 많고 이기적인 내가 오빠보다 손 위였다면 나는 오빠처럼 동생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집안의 어려움을 고민하면서 살 수 있었을까? 글쎄 그렇게 살 수는 있었더라도 동생이 아니면 내가 이룰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손에 쥐지 못했던 것들을 아쉬워하면서 살았을 것 같다.


편지 형식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마음이나 오빠의 상황을 헤아려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의 상처를 감추고 오빠의 괴로움을 멀리 던져둔 채, 우리 집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싸우고 화해하고 미워하지만 사실은 바탕에 넘치는 애정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겠지. 어떻게든 멋진 문장과 그럴듯한 단어로 포장하기 바빴겠지. 하지만 편지로 쓰는 글에서는 화려한 문장이 들어갈 틈이 없고 감정을 뺀 그럴듯한 말이 설 자리가 없었다. 늘 한 문단을 쓰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고치고 다듬던 나는 이번엔 1500자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드러낼 수밖에 없는 글쓰기를 가지고, 언제든 감정을 숨긴 채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의 퇴로를 차단한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다가 익숙해지면 평범한 문장으로도 나를 드러낼 수 있겠지. 무더위가 지나고 열기가 한소끔 식으면 풀벌레가 울고 가을이 오듯 나에게도 그런 자연스러운 글쓰기 하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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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