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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지 못해서

글에는 다 보인다

by 한걸음

글은 나를 반영한다. 그래서 속 시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다. 내가 쓴 글을 보니 얼마나 나를 감추고 싶어하는지 훤히 느껴진다.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글을 쓰다가 ‘불안’이라는 단어가 ‘긴장’으로 탈바꿈했고, ‘불면으로 잠 못 드는 밤’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자아’로 대체 되어 있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없어서일까? 자신이 없는 걸까.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나를 재단하고 깎아서 백지 위에 올려놓았다. 읽는 사람도 뭔가 감추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문장이 끊어지고 문맥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암막커튼처럼 어떤 부분은 가려두고 선보였으니 이어질리 없다.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점점 지쳐갔다. 어떤 의미와 보람도 느낄 수 없었고 매일 마주쳐야 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힘에 부쳤다. 열심히 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구조와 정치적인 역학 관계가 꼴 보기 싫었다. 10년 전의 일과 지금의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지겨웠고 앞으로 10년이 지난들 지금처럼 제자리일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 모든 상황을 괜찮다는 말로 잘도 넘겼다. 생각과 감정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 나에게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어두운 부분을 밝은색으로 덧칠했다. 사람들은 내가 힘든지, 아픈지 잘 몰랐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에서는 더 이상 가릴 수가 없다. 거울보다 글이 나를 더 또렷하게 비추며 ‘괜찮다는 거짓말 좀 그만해!’라고 소리친다.


나는 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아픈 나를 끌어안고 조용히 토닥일 줄도 몰랐다. 남들에게는 위로를 잘만하면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언어는 완전히 실종되어 있었다.


같이 일하는 후배 중에 명랑한 친구가 있었다. 늘 밝은 얼굴이었고 소리 높여 잘 웃었다. 퇴근 무렵 본인 일이 다 끝났는데도 내가 가지 않고 있으면 “제가 뭘 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라고 묻는 착한 아이였다. 활짝 웃는 얼굴이 예뻤지만 가끔은 그 뒤에 극심한 노력이 겹쳐 보여서 안쓰러웠다. 그러다 인간관계도 업무도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루는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 보여서 따로 만났다. “약을 먹는 것도 괜찮고, 치료를 받는 것도 괜찮아. 너무 힘들면 휴직해도 돼. 지금은 네가 제일 중요하니까. 네가 일을 정말 잘하고 있고 그래서 나도 도움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에 휴직을 한다면 많이 아쉬울테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아니야. 내가 아니어도 어떻게든 다 돌아가. 혹시 동료들한테 미안해서 그런거라면 그런 생각 안 해도 돼.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


사실 이 말은 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아끼는 누군가가 이 말을 해줬으면 했다. 후배에게 말을 건네면서 많이 울었다. 후배가 앉은 자리에 지치고 상처받은 내가 있는 듯 했고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내 눈물과 겹쳤다. 한번도 스스로에게 다정한 적 없던 내가 남을 위로하며 위로받았다.


앞으로 글에서 나를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하지만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도 나의 일부라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나를 내 보인다는 것 자체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투명한 글에 나를 비춰보면서 한걸음씩 내딛는 연습을 이제 시작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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