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배우 윤여정 선생님이 저 멀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영화 ‘미나리’로 이미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받은데다가, 가장 유력한 수상후보로 쭉 거론되었기에 생각보다 놀랍지는 않은 결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놀라운 결과였다. 그녀는 언제나 ‘먹고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연기를 해왔노라 이야기했고, 그 치열함이 오랜 시간 쌓이자 어느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지금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시절, 현대카드의 온라인 콘텐츠 채널인 채널현대카드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일을 보조했었다. 진행자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줬던 음악을 소개하는 [라디오 인 뮤직 라이브러리], 건축, 디자인 분야의 역사를 돌아보는 [라이브러리 카툰], 각 분야의 명사들이 자신의 영감의 원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스퍼레이션 토크] 등 다양한 콘텐츠들이 있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상이 바로 인스퍼레이션 토크의 윤여정 선생님 편이었다. 컨버스의 잭퍼셀을 신고 와이드팬츠에 도트무늬의 블루종을 멋들어지게 소화한 선생님의 패션도 패션이거니와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던 원천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처음으로 내 인생의 멘토로 삼을 만한 어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뷰에서 그녀는 나 자신으로 살면 되는 것이지, 인생에 멘토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우습다고 말했지만. 하지만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난 67살이 처음이잖아’라고 말했던 그녀의 말처럼 처음 살아보는 인생에 길잡이가 될 만한 무엇 하나쯤은 쥐도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영감의 원천을 ‘다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나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정석적인 미인형이 아니었던 본인으로서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해낼 수 밖에 없었다며.
삼십줄에 들어서고 내가 밥벌이고 하고 있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함이 생기면서, 나는 이제 불투명한 바로 앞의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해방되었다. 대신 훨씬 더 어렵고 답이 보이지 않는 난제를 떠안게 되었는데, 바로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더 먼 미래에 대한 고민이다. 나는 시간이 그저 나를 스쳐 지나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흘러가는 시간들이 나에게 어떤 형태로든 쌓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변화의 바람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흐름은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배움에는 때가 없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언제든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날 수 있으면서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귀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랐다. 내 안에는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과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마냥 한없이 흔들리던 철없던 시절보다는 좀 더 무게감을 가지고 휩쓸리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으면서도, 나이 때문에 스스로에게 제한을 두지 않는 철없는 어른이로 남고 싶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은 시간의 깊이가 필요한 것과 변화를 놓지 않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잘 구분해 내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과업이 아닐까?
나 애써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냥, 내 인생이 그런 것 같더라구.
애쓰지 않으면 올 수가 없더라구.
나는 이렇게 괴로움이 있더라도 살아있으면, 살아서 자신이 믿는 것을 쭉 밀고 나가다보면 언제든 멋지고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증명해내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가끔 나다움을 잃을 것 같을 때, 머나먼 미래에 대한 아득함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은걸까? 하고 작은 의심의 씨앗이 생겨날 때에도 버텨낼 수 있는 작은 버팀목이 되어 주니까. 내가 이렇게 애써서 살고 있는 인생에도 언젠가 예상하지 못했던 놀랍고 즐거운 일들이 생길 거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