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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간편한 도피 여행

by 민지쿠

내 영상 취향은 참으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일단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는다. 긴 호흡으로 영상을 반복적으로 챙겨보는 것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나는 살면서 단 한편의 드라마도 정규방송으로 챙겨 본 기억이 없다. 예능 프로그램에도 큰 관심은 없어서, 삼시세끼의 일부 시리즈를 제외하면 역시나 챙겨보는 프로그램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TV에서 방영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방송을 인터넷 뉴스 기사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고로 밥벌어 먹고 있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긴 하지만,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소위 말하는 ‘TV 대신 유튜브를 보는 요즘 애들’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 나는 본디 영상 매체보다는 텍스트 매체를 선호해서, 아무리 짧은 호흡으로 편집한 유튜브 영상 콘텐츠라고 해도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짧은 영상이 지루하다고 해놓고 이렇게 말하긴 참 이상하지만 나는 영화만큼은 정말 좋아한다.(내 영상 취향이 복잡하다고 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사소한 진통을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 혹은 무엇이 진짜 가족을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 한정된 시간 안에 감독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는 이야기, 감독이 재주를 한껏 부려 한치의 틈도 없이 정교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가끔은 대책없이 낭만이 가득한 사랑스러운 이야기도, 어디엔가 꼭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도 좋다. 영화는 한정된 러닝타임 특성상 하나의 세계가 응축되어 담겨있는데, 나는 아마도 그 이야기의 깊이에 끌리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 중 2시간 혹은 3시간만 투자하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흠뻑 느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현실 세계가 문득 고달프다고 느껴질 때면, 영화를 통해 다른 세계로의 도피를 시도한다. 사랑스러운 기분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영화나 세상의 모진 풍파에 닳아버린 낭만을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영화들을 찾고 찾아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를 켜고,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기만 하면 다른 세계로 떠날 준비가 끝난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도피 여행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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